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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서 도령의 고백 대작전

​- 정스루 @srue0209_tua

​루서 앨리슨

※ 고증을 맞춘다고 신경 쓰긴 했는데 소재 상 의아한 점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편하게 봐주세요.
※ 실제 조선보다 현대적인 사고관을 가졌습니다.
※ 캐릭터 붕괴가 있습니다.


 루서 도령과 앨리슨 아씨가 연애를 한다는 소문은 옆 고을 사람까지 아는 사실이었다. 둘이 같이 서당의 담을 넘어 놀러갈 때부터 앉은자리에서 사서삼경을 줄줄 외울 때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기도 했다. 사람들은 누가 먼저 혼인에 대한 언질을 넣을지, 언제 넣을지에 대해 내기하곤 했다. 봄이 오고 청명이 지나면 드디어 둘이 공식적인 반려가 됨을 다들 축하해줬다. 두 사람의 오랜 친구들이자 형제기도 한 우산관 유생 동기들은 둘의 혼례식에 대해 아닌 척 깊이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런 그들에게도 루서의 다급한 부름은 의아한 것이었다. 가장 먼저 찾아온 사람은 파이브와 벤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마주한 것은 혼약에 대한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한 청년이 아니라, 안색이 파리하게 질린 소년이었다.
 “아니... 왜 이렇게 울상이야? 자기가 제일 먼저 장가가겠다고 술 한 병을 제일 먼저 비우던 사람이?”
 파이브의 표정이 시큰둥했다.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목소리여도 오랜 친우인 루서와 벤은 충분히 그 기저에 깔린 걱정을 읽을 수 있었다. 벤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무슨 걱정이라도 있어? 이제 와서 부모님이 반대하실 리는 없고. 아, 혼약 관련한 일이 아니야?”
 그의 부드러운 어투에 우물쭈물하던 루서도 겨우겨우 입을 열었다. 곰 같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였다.
 “혼담은... 이미 드렸어.”
 “그럼 된 거 아니야? 고민할게 있어?”
 “그게, 앨리슨이... 앨리슨이 드렸어...!”
 루서가 드디어 크게 소리를 질렀다. 파이브와 벤이 어리둥절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무슨 문제야?”
 “처음으로 달밤에 둘이서만 놀러가자고 한 것도 앨리슨, 연인으로 발전하자고 말한 것도 앨리슨, 백년가약 하자고 언약반지를 선물해준 것도 앨리슨, 심지어 우리 부모님께 혼담을 넣은 것도 앨리슨이야...!”
 “앨리슨이 그럴 수도 있지...?”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당연히 앨리슨이 하겠지. 그럼 네가 하겠냐?”
 파이브의 어이없어하는 말투를 뒤로 하고, 루서가 억울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나도...! 나도 앨리슨한테 뭔가를 해주고 싶단 말이야! 언제까지 받고만 있을 순 없어. 앨리슨이 듬직하고 믿음직하고 멋있고...”
 “적당히 해.”
 “아무튼... 여러모로 완벽하다는건 알지만 가끔씩 앨리슨이 믿고 뒤를 맡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주고 싶어. 반려란 그런 거 잖아. 한 명이 힘들 때 함께 이겨내는 힘을 내는...”
 벤이 루서를 다독였다. 부드럽게 토닥이는 손길에 울상이 된 루서도 겨우겨우 얼굴을 들어 그들을 바라봤다.
 “어휴, 그래도 새 신랑 얼굴이 그러면 쓰나. 복이 들어오긴 커녕 있던 복도 나가겠어. 그래서, 우릴 부른 이유가 뭔데? 단순히 한탄만 하려고 부른 것 같진 않은데. 꽤나 다급한 편지였잖아.”
 “아, 그거...”
 “딱 봐도 모르겠냐. 앨리슨에게 멋진 반려처럼 보이게 도와달라는거잖아.”
 빠르게 요점을 집는 파이브에 루서가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벤은 과연, 하고 마침 예상하던 참이었는지 금방 수긍했다. 루서가 둘의 손을 콱 잡았다. 손을 빼기에는 들어간 힘이 만만치 않고 무엇보다 잡은 사람의 표정이 애처로워 그 파이브도 가만히 손을 놔둘 수 밖에 없었다.
 “좋아. 도와줄게. 어떻게 도와주면 될 것 같은데?”
 “그건...”
 루서가 겨우 말을 이었다.
 “생각 안했어.”
 “생각 안했구나. 에라이 이놈아!”
 파이브가 손을 내쳤다. 루서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도, 그래도 말이야! 우산관 우등생들인 너희들이 있으니까 뭐라도 그럴듯한 방안이 나오지 않을까해서, 마침 제일 먼저 온 사람들도 너희들이고...!”
 “어휴, 그래 알겠어. 파이브, 벼루는 내려 놔. 일단... 일단 조금 머리를 식힐 필요가 있겠다. 루서, 심호흡하고... 너도 호흡 좀 천천히 해봐 파이브. 응. 서책 구기면 안돼.”
 벤이 둘을 중재하며 말했다. 루서와 파이브가 진정하는 동안, 생각을 먼저 말한 것은 벤이었다.
 “오히려 이런 부분에선 고전적으로 가야하는거 아니야? 왜, 여느 서책을 봐도 연인들은 줄곧 연시를 주고 받곤 하잖아. 먼 곳에 떨어져도 둘의 마음은 변치 않을거라고 믿으며... 사모하는 임을 생각하면서 쓴 편지를 보면서 연정에 믿음을 가지는 주인공처럼 말이야.”
 “너 요즘에도 패관문학 보냐?”
 “그런 편이지. 어쨌든 글은 다양하게 읽는게 좋으니까. 그리고 결정적으로 클라우스도 데이브한테 연시 엄청 보내던 거, 기억 안나? 글짓기는 소름 끼치게 귀찮아해서 내가 불러준 대로 적던 놈이 연시 하나는 자기가 줄줄이 뽑아내더라. 난 걔가 그렇게 손이 빠른 줄 그 때 처음 알았잖아. 루서 네가 먼저 혼인하는 통에 바로 다음은 자기라고 이를 갈고 있던데.”
 벤은 당당한 기색이었다. 파이브는 그런 벤을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으려다, 가만 생각해보니 제법 그럴듯해 고민하는 기색을 띄었다. 루서 역시 앨리슨이 가끔 벤에게서 통속소설을 빌려 읽는 걸 알고 있었다. 파이브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래. 연서 괜찮다. 혼담까지 오고 간 사이에 새삼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앨리슨이라면 좋아할지도 몰라. 나도 연시로 돌로레스의 마음을 얻었으니까.”
 “근데 걔 비구니 됐잖아.”
 “너 조용히 안해? 도와주는 사람을 이렇게 대할거야?”
 “아니, 그. 미안해...”
 루서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사과하던 중 가만히 생각하던 벤이 흠칫 놀라며 소리쳤다.
 “야, 근데 루서 네가 쓰게?”
 “어?”
 “그거야 당연... 어?”
 셋의 말이 멈췄다.
 “야, 아무리 그래도 우리가 나이가 몇인데. 연서 하나 정도 쓰는 건... 너 마지막으로 편지 써 본 적이 언제야? 우리한테 쓴 편지는 안 쳐줄거야. 정말 정식으로 써본 적이...”
 “기억도... 안 나는데...”
 이야... 파이브가 긴 한숨을 쉬었다. 벤이 포기하지 않고 루서를 응원했다.
 “아냐, 아직 그만두긴 일러. 마음이 솔직하게 담긴 연서라면 앨리슨은 기뻐할거야.”
 “아서라. 앨리슨 걔가 문장을 얼마나 잘 쓰는데? 괜히 열심히 쓴 티 내면서 편지까지 보내는데 정작 글은 이제 막 천자문 배운 어린애처럼 쓴다고 생각해봐. 있던 정 없던 정 다 털리고 혼인 서약까지 물릴지도 몰라. 저 덩치를 앨리슨 아니면 누가 데려가주냐?”
 파이브가 날카롭게 공격하듯 말했다. 조금 밝아졌던 루서의 표정이 삽시간에 다시 어두워지자 벤은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첫 번째 대책은 쉬이 떠오른 만큼 간단하게 물 건너가고 말았다. 셋의 한숨만 길어졌다.
 밖에서 새로운 누군가의 도착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등장한 사람은 인재 등용의 길을 그만두고 서역으로 가 악기를 공부하러 간 바냐였다. 혼인도 공부하러 간 곳에서 바로 올렸다며 못 본 지 꽤 되었는데 얼마 전 공부를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온 참이라 인사도 해야 할 겸 올라온 것이었다. 셋이 그를 반갑게 맞았다.
 “루서, 축하해! 다행히 네 혼례는 볼 수 있겠네.”
 “이게 얼마만이야! 아이고, 얼굴에 꽃이 피었네. 그러고보니 너도 신혼이지? 좋을 때네~”
 서로가 안부를 주고받았다. 바냐는 아이들의 물음에 성실히 대답했다. 서역의 처음 보는 물건들부터 이해할 수 없었던 사람들까지. 부른 사람은 루서였으나 어느새 대화의 주도자는 바냐가 되어있었다. 불만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바냐를 깔보는 이들의 얘기에 같이 분개했다가, 이번에 바냐의 반려가 된 씨시와의 연애담엔 즐겁게 웃으며 경청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말하는 바냐는 두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우산관 유생일 시절 유난히 바냐와 벤을 싸고돌았던 파이브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바이올린이 얼마나 고운 소리를 내는지 말하던 바냐는 평소에 조용한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두 손을 열정적으로 움직이면서 설명했다.
 “바이올린의 현들이 내는 소리는 정말 아름다워. 음악을 배우는게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살아있는 벗은 아니라지만 그들이 사람이었다면 분명 관중과 포숙아 사이의 우정보다 더 깊은 믿음을 나눴을거야. 루서, 네가 허락만 해준다면 너와 앨리슨의 혼례식에서 연주해주고 싶은데. 어때?”
 “그거 나야 좋지. 아, 맞다. 혼례식...!”
 갑자기 바냐를 제외한 셋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오랜만에 본 바냐의 이야기에 홀딱 빠져 흥미진진하게 듣고 있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던 것이다. 그러고보니 마당쇠가 차를 세 번은 갈아줬었지. 아이고야, 내 정신 좀 봐. 루서가 당황하며 절절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바냐가 의아한 듯 자초지종을 물었다.
 “아, 그런거였나? 안그래도 내가 자네들한테 말하려던게 있었는데...”
 바냐가 그들에게 제의한 것은 뱃놀이였다. 원래는 씨시와 그의 아들인 할런만 데리고 갈 참이었는데, 데이브와 놀 곳을 찾던 클라우스가 그 소식을 듣고 합류했던 것이다. 순식간에 셋만의 시간을 방해 받은 바냐는 차라리 이번 기회에 못 보던 친우들과 즐겁게 놀라는 씨시의 말에 다른 동기들까지 초대하려고 오게 된 것이었다. 그곳이 유독 꽃들이 일찍 펴 지금 가면 만개한 꽃들에 바람만 살살 불어도 향기에 취할 정도라고. 루서는 화관을 쓴 앨리슨을 상상했다.
 “이 앞 청옥강은 알지? 날씨도 선선히 풀리고 지금이 딱 가기 좋은 때야. 뱀 조심은 해야겠지만... 내가 바이올린도 연주해줄테니 다들 오라고.”
 다정하게 웃으며 청하는 바냐에 루서가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고마워했다. 곰 같은 사내가 와락 안아오는 탓에 자그마한 바냐는 쭈그러들 수 밖에 없었다. 결국 파이브가 이 미련곰탱이가 언제까지 남의 집 귀한 딸을 괴롭힐 작정이냐며 등판을 세게 치기 전까지 루서는 바냐를 안고 감사 인사를 하고 있었다.
 날이 밝자 작정하고 힘 주려고 진한 푸른색 비단에 은색 실로 수를 놓은 예복을 입고 나타난 루서가 가장 먼저 도착해 주변 꽃들을 닥치는대로 모아 화관을 만들었다. 사랑의 힘인지 날을 다룰 때만치 조심스럽게 꽃을 엮어 그럴듯한 모양을 만들어낸 루서의 얼굴에 환희가 깃들어 있었다. 연습용으로 만든 화관을 풀어 강물에 던지려던 차에 클라우스가 데이브의 팔에 매달린 채로 나타나는 것이 보였다. 클라우스가 무슨 일이래. 가장 늦게 도착할 줄 알았는데. 술을 끊었다는건 사실인가보군... 루서가 꽃송이들을 하나하나 흐르는 물에 떠내려 보내며 생각했다.
 “어머, 봐 데이브! 만개한 꽃들이 강물에 실려오고 있네. 저렇게 온전한 꽃들이 떠다니다니 신기한 일이지?”
 “그러게. 아니면... 혹시 이것도 클라우스 네가 준비한 건 아니고? 저번에도 너는 모르는 일이라면서 우리 집에 온갖 장신구를 잔뜩 선물해줬잖아. 보석이 어울리는 건 내가 아니라 넌데.”
 “데이브, 세상에...”
 클라우스가 감격한 얼굴로 손을 뻗어 데이브의 허리를 감쌌다.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루서는 참을 수 없었는지 성큼대며 걸어와 둘에게 큰 소리로 인사했다.
 “그래! 클라우스랑 데이브! 자네들 잘 지냈나?”
 “깜짝이야! 루서!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눈치도 없긴. 조금만 더 늦게 나오지.”
 클라우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악의 없는 표정으로 루서에게 말했다. 클라우스는 크게 기침을 하며 루서와 인사를 나눴다. 클라우스가 데이브를 이끌고 먼저 배를 타러 간 사이, 다른 이들이 속속들이 도착했다. 신기하게 생긴 악기 보관함을 가져온 바냐와 씨시부터 좋아하는 책을 이고 온 벤, 이제 이런 옷을 입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며 꽃분홍 치마와 저고리를 곱게 차려입은 앨리슨까지. 파이브는 갑자기 임금께서 부른다며 불참을 알렸지만, 나머지 이들은 오늘을 기점으로 한동안 파이브는 보이지 않겠군, 하며 어림짐작했다. 임금이 신뢰하는 발명가의 삶이란 그러했다.
 “다들 잘 와줬어! 자, 클라우스네는 먼저 배를 타러 갔군. 나도 짐을 놔두고 올테니 금방 올라감세. 다들 먼저 타러 가라고.”
 “잠깐만, 디에고가 오지 않았는데?”
 “어라. 정말이잖아? 안 온다는 말은 없었는데...”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저 멀리서 달려오는 인영이 보였다. 급하게 왔는지 숨을 헉헉 대는 디에고가 입는 옷은 그가 아껴서 잘 꺼내 입지 않는 주황색 비단 옷이었다. 친우들과 뱃놀이를 즐기려고 입은 옷 치곤 과해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디에고가 벤을 발견하곤 급하게 그를 이끌어 먼저 배에 올라탔다. 인사를 끝낼 채도 없는 다급한 행동에 다들 어안이 벙벙해졌지만, 곧 정신 차린 앨리슨이 루서를 데리고 배에 올랐다.
 나룻배가 두둥실, 여유 있게 물살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급할 것 하나도 없는 둘은 강가 너머의 풍경에 감탄하며 생각나는 시조를 하나씩 읊었다.
 “울 옆의 맑은 시냇물, 그 위엔 누대가 서 있고. 대 앞에는 가득히 복사꽃이 만발했네. 꽃잎을 은밀하게 흐르는 물에 띄워 보내지 말라. 어부가 찾아들까 염려되나니.”
 “두류산 양당수를 예전에 듣고 이제 보니. 복사꽃 뜬 맑은 물에 산 그림자조차 잠겼어라. 아이야, 무릉이 어디냐. 나는 여기인가 하노라.”
 “제법 시조 외는 솜씨가 늘었네?”
 “조금 공부했지.”
 즐겁게 웃는 앨리슨의 모습에 루서도 덩달아 가슴이 붕 뜨는 기분이었다. 품 안의 화관이 가슴을 간질이는 기분이었다. 그가 조금 구겨진 화관을 손으로 잘 매만져서 모양을 잡은 다음 앨리슨에게 내밀었다. 앨리슨이 두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다가, 곧 기쁜 얼굴로 머리에 썼다. 루서의 짐작대로 둘은 잘 어울렸다. 앨리슨의 검은 곱슬머리에 연한색의 꽃은 눈송이마냥 가볍게 얹어져서 왕관처럼 보였다. 지금 앨리슨은 루서에게 월궁항아였고 침어낙안의 미인이었다. 아닐 때가 있겠냐마는 그랬다.
 “곱다. 잘 어울려.”
 “하기사 그렇겠지. 이거, 네가 만든거니? 신기해라. 잘 만들었네. 솜씨가 좋구나.”
 앨리슨이 머리에 씌워진 화관을 조심스레 더듬었다. 멀리서 악기 소리가 들렸다. 바냐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모양이었다. 간간히 떨어지는 꽃잎부터 음악 선율, 기뻐하는 앨리슨까지. 루서는 지금이 앨리슨에게 마음을 알리기에 가장 적절한 시기라고 생각했다. 아니, 더 좋은 기회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앨리슨, 할 말이... 할 말이 있어.”
 루서가 달아오른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짐짓 단호해 보이는 그의 얼굴에 앨리슨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내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러니까...”
 “야, 거기 뱀이다, 조심해!”
 그가 벌떡 일어나 외치는 중에 물을 헤엄치던 뱀에 맞은 것인지 배가 크게 흔들렸다. 으악, 루서가 뒤늦게 자리에 앉으려고 했지만 이미 배는 반쯤 기울어 버렸다. 루서가 숨을 들이마시기 무섭게 배는 뒤집어졌다. 루서가 재빨리 물 속에서 눈을 뜨고 물 위로 뜬 앨리슨을 발견하자마자 빠르게 수영해 앨리슨을 붙잡아 빠져나왔다. 앨리슨 혼자만으로 충분히 헤엄쳐 올 수 있다는걸 알고 있는 루서였지만, 그의 행동은 반쯤 본능적인 것이었다. 둘이 강가에 누워 크게 숨을 쉬었다. 저 멀리서 바냐와 씨시가 다급하게 뛰어왔다. 아직 선선한 날씨에 고뿔에 들까 얼른 그들에게 마른 겉옷을 가져다 준 둘은 차라도 내오겠다며 다시 돗자리를 펴둔 자리로 뛰어갔다. 루서는 처참하게 망가진 꼴을 보면서 할 말을 잃었다. 정말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다신 없을 순간인 것 같았는데...
 “루서, 루서! 뭐가 그렇게 울상이야. 안 다쳤으니 된거지.”
 앨리슨이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역시 물에 젖은 생쥐꼴이었다. 루서가 힘들게 만든 화관은 엉망이 되어 꽃이 찢어져 엉성하게 앨리슨의 머리칼에 달라붙어 있었다. 앨리슨이 기분 나빠하지 않아 다행이었지만, 루서는 자신감을 잃었다. 완벽해보였던 두 번째 기회도 이렇게 넘어갔다.
 이야아... 집으로 돌아온 루서의 표정이 멍해졌다. 이러다가 앨리슨의 반려가 될 만한 재목이 아니라고 사람들이 생각하면 어쩌지. 그런 말을 중얼거리자 옆에서 뻔히 듣고 있던 클라우스가 시원하게 웃어재꼈다.
 “이야~ 둔탱이 루서도 그런 고민을 했던거야? 정말 혼인이 사람을 바꾸긴 하는구나.”
 “조용히 해. 몰라, 이제 다 끝났어. 앨리슨은 아무런 말 하지 않겠지만, 내가 그 애의 만족스러운 반려가 되는 건 바라지 않을거야. 왜냐, 난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니니까.”
 “어휴, 답답한 소리 그만하셔. 네가 이렇게 소심한 사람이라는 걸 앨리슨이 알아야 하는데.”
 “아니! 앨리슨이 이런 모습까지 알면 정말 싫어할지도 몰라!”
 “앨리슨이 정말 네 소심한 면을 모르고 있진 않겠지만... 어휴. 됐다 됐어.”
 그가 태연하게 웃으며 다과로 나온 앵두편을 집어 먹었다. 늘어지게 누운 채 술처럼 차를 마시던 그가 루서를 돌아보았다.
 “네가 재밌어할만한 소식을 알려줄까? 디에고가 요즘 누구랑 연서를 주고받는다던데.”
 “뭐, 디에고가? 누구랑?”
 글 못 쓰기로는 자신이랑 일, 이등을 다퉜던 그 디에고가 그런 짓을 한다니! 자신은 마음 속에 있는 말을 글로 담아내지 못해 글쓰기를 힘들어했다면 디에고는 그런 남사스러운 짓은 못하겠다며 거부한 쪽이었다. 그런 디에고가 시를, 그것도 연시를 쓴 편지를 주고받는다고? 루서는 방금 전까지 침울해있던 모습과 다르게 재빨리 귀를 세우고 들었다.
 “소문에 의하면... 상대는 핸들러의 고명딸 라일라라는데.”
 “뭐어, 라일라? 야, 파이브가 이 소식을 들으면 난리나겠네.”
 “내 말이! 디에고도 대단하지. 라일라네 어머니가 핸들러인데도 만나고 싶을까? 어쨌든 그 백절불굴의 사나이도 사랑 앞에선 한 명의 청년인가봐.”
 클라우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디에고 그 녀석, 내일 밤에 고백한대. 연인이 되게 해달라고 말할건가봐. 너 왜, 이번에 청에서 외교대신들이 엄청 왔다는 건 들었지? 연회 한다고 폭죽을 원 없이 쏜다잖아. 그걸 구경하면서 고백할거라고 벤한테 말했다는데... 어휴, 걔도 그렇게 안 생겨서 제법 귀여운 면이 있어... 넌 표정이 왜 그러냐?”
 “바로 그거야! 불꽃놀이!”
 루서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종이와 붓을 들었다. 갑자기 다과를 치워 버리는 통에 클라우스의 얼굴에 앵두편 몇 개가 떨어졌다.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킨 클라우스가 정성스레 먹을 가는 루서를 의아하게 쳐다봤다. 제가 진짜 왜 저래? 결혼한다고 맛이 갔나...
 불꽃놀이라면 뱃놀이 때 잃었던 기회를 충분히 상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앨리슨은 진기한 구경하기를 좋아하니까 분명 즐거워 해줄거야. 루서의 머릿속에 새로운 계획이 착착 세워져 갔다.
 밤이지만 화려한 불꽃놀이에 환해질거라 생각해 파란색 예복을 차려 입은 루서가 조정의 연회가 잘 보이는 언덕 위로 올라가 앨리슨을 기다렸다. 루서가 소소하게 신경 쓴 갓끈은 움직일 때마다 찰찰 소리를 냈다. 앨리슨은 오늘 샛노란색 치마를 입은 채였다. 치마폭에 매화꽃 모양으로 놓인 수가 움직일 때마다 은은히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루서! 외교관들을 맞이하는 연회가 오늘 있다는 건 어떻게 안거야? 나도 몰랐던 소문인데!”
 흥분한 앨리슨이 말했다. 루서는 어쩌다보니 알게 되었다면서 대답을 얼버무리며 앨리슨이 머리에 한 댕기를 쳐다보았다.
 이번에 루서가 준비한 선물은 비녀였다. 혼인한 여인들만 하는 비녀. 급하게 찾느라 아주 화려한 것을 구할 수는 없었지만 어렵게 구한 장식 없는 금비녀였다. 마음 같아서는 옥으로 된 몸체에 나비 장식이 달린 걸 주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구할 수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었다.
 루서와 앨리슨이 자리를 잡고 앉기 무섭게 궁에서 첫 번째 폭죽을 쏘아 올렸다. 제법 되는 크기에 앨리슨의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흰색 불꽃이 화려하게 밤하늘을 쪼갰다. 곧이어 두 번째 탄이 발사되었다. 제법 환해진 빛에 아이처럼 기뻐하는 앨리슨의 표정이 보였다. 폭죽을 원 없이 쏟아 부을거라더니 과연 그랬다. 이전에도 몇 번 불꽃놀이를 본 적 있는 그였으나 꽃처럼 피어나는 빛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소리는 천둥번개처럼 거대했지만 그 전에 보이는 색색깔 불꽃에 앨리슨은 넋을 빼앗겼다. 그런 루서는 이번 기회도 물 건너 갔음을 느꼈다. 지금 앨리슨에겐 무슨 말을 해도 들리지 않을게 분명했다. 멍청이. 멍청이 하루서.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집에 불러서 얘기할걸. 그래. 차라리 앨리슨이 정신 없을 때 말해버리자. 그리고 그냥  털어버리자. 루서가 마음을 다잡았다.
 “저... 앨리슨.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루서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나와 혼인하겠다고 해줘서 고마워. 사실은, 사실은 난... 아직 내가 너에게 잘 어울리는 반려인지 확신하지 못하겠어. 넌 시도 잘 짓고, 말도 잘 타고, 성격도 좋고, 모두의 주목을 받는 사람이니까.”
 그가 눈을 질끈 감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도 날 좋아해줘서 고마워. 너와... 너와 혼인한다면... 네 반려에 어울리는... 듬직하고 멋진 사람이 되려고 노력할게. 아니, 아니! 반드시 될게!”
 슬며시 뜬 눈에 그를 보며 미소 짓는 앨리슨이 보였다. 루서가 들리지 않기를 빌었던 소원이 무용지물이 된 게 분명했으나, 그는 슬프지 않았다. 오히려 심장이 더 크게 뛰는게 느껴졌다.
 “루서. 난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너를 믿고 있어.”
 앨리슨이 손을 뻗어 루서의 손을 잡았다.
 “넌 네 반려가 될 자격이 충분해. 그리고 그 자격은, 내가 널 사랑하는 만큼 네가 날 사랑해준다는거고.”
 불꽃이 하나 더 터졌다. 소음에 귀가 아플 정도였으나 앨리슨의 목소리는 루서의 귓구멍을 비집고 정확히 들어갔다.
 “넌 이미... 이미 나에겐 충분한 사람이야.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 반려가 된다는건 힘든 일을 함께 이겨내자는거잖아. 난 너와 함께라면 불행해질 각오도 되어있어.”
 루서는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게 불꽃놀이의 열기 때문이 아님을 둘 모두 알고 있었다.
 “나와 결혼해줘서 고마워 루서.”
 그가 루서를 껴안았다. 루서가 팔을 앨리슨에게 두르자, 그의 품에서 비녀가 떨어졌다. 떨어진 비녀를 주운 앨리슨은 루서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그 의미를 알아채고 빙긋 웃었다. 곧 그가 댕기를 풀고 비녀로 머리를 간단하게 틀어올렸다. 루서가 상상한 그대로, 앨리슨이 하기에는 지나치게 초라한 비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상상한 것보다 아름다웠다. 폭죽이 하나 더 쏘아올려졌다. 밤하늘을 수놓는 빛이었다. 루서가 본 그 무엇보다 찬란한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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