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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리체 @liche_0

파이브 클라우스, 벤 클라우스


1.
파이브는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다. 어린 임금은 백성들에게 늘 어질었고 정사에 밝아 성군이었으나 동시에 조정 대신들에게는 깨나 무서운 존재였기에 폭군이기도 했다. 누구보다도 폭군의 면모를 가장 자주 보는 이들은 그와 가까운 이들이었다. 이를테면 루서, 디에고, 그리고 클라우스였다.

1-1.
폭군이라고는 해도 대신들의 헛소리에 으름장을 놓거나, 외교에서 도무지 어찌할 방도가 없는 일이 생겼을 때 왕의 서재에 혼자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는 일 정도였다.

1-2.
그게 다였다. 아마도.

2.
루서는 파이브의 배다른 형제이나 정사에 머리 쓰는 것이 맞지 않아 내금위장이 되었다. 디에고는 내금위 소속이었는데 루서는 왕을 등에 업고 그 자리에 앉았다고 생각했기에 자신이 루서보다도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하여 둘의 싸움이 잦았는데 어린 왕은 호위가 없어도 될 정도로 무예가 뛰어나 둘의 싸움이 시작되면 그들을 버려두고 홀로 걸음을 옮겼다.

2-1.
매번 같은 싸움에 짜증이 가득 묻어난 용안은 유생 하나를 마주하면 금세 풀어지고는 했다. 정작 왕은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아 뒤늦게 쫓아온 루서와 디에고는 입을 한일자로 다물고 어렵게 웃음을 참아야 했다.

2-2.
그 유생의 이름은 클라우스다.

3.
어린 임금은 곤룡포를 어깨에 걸치기 전, 유생이었다. 같이 방을 썼던 학우는 벤과 클라우스였다. 벤은 파이브를 처음 본 날부터 언제나 깍듯하게 굴며 예를 지켰고 클라우스는 파이브를 처음 본 날부터 스스럼없이 굴었다. 파이브는 그것이 싫지 않았다.

3-1.
관직에 오른 후에는 보는 눈이 없을 때 벤도 가끔, 정말 아주 가끔은 왕의 이름을 부를 때가 있었다. 클라우스는 어렸을 때부터도 자주 예를 잊은 듯 굴어 루서나 디에고, 부모님이나 다른 대신들에게까지도 혼이 나고는 했다. 정작 임금일 때도, 세자일 때도 파이브는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고는 했다.

3-2.
클라우스는 세자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고 예를 차리지 않는다고 혼을 내는 부모님 앞에서 ‘자리에 없으면 나라님도 될 수 있다는데….’ 라고 말했다가 아버지에게 회초리로 종아리가 부을 때까지 맞은 적도 있었다. 파이브도 아직 유생일 때의 이야기다. 그날 절뚝거리며 성균관으로 돌아온 클라우스는 이불에 엎어져 발을 구르며 엉엉 울었다.
‘파이브는 왜 왕이야? 너무 싫어!’
그건 바꿀 수 있는 게 아니고, 아직 왕이 아니라고 지적하려다 울음에 묻어 이어지는 잔뜩 볼멘소리에 파이브는 입을 다물고 무서운 얼굴을 하고는 방을 나가버렸다. 클라우스는 파이브가 그길로 돌아오지 않을까 겁이 났는데 그는 다행히도 석식 전에 돌아왔다. 클라우스는 티가 나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 파이브가 주먹을 내밀기에 슬그머니 그 밑으로 두 손을 펼쳤더니 어여쁜 두루주머니가 손 위로 톡, 떨어졌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열어보니 연고가 있었다.
‘내의원에 다녀왔다.’
그 말만 뱉어놓고 파이브는 석식을 먹으러 가버렸고 클라우스는 허겁지겁 그의 뒤를 쫓았다.

3-3.
클라우스는 그 두루주머니를 상처가 낫고 나서도 한참을 소중하게 들고 다녔다. 파이브가 그렇게 좋으냐 물었을 때 예뻐서 좋다고 했더니 아직은 한낱 유생이었던 파이브의 얼굴에 희미하게 미소가 번졌다. ‘나도 그래서 네가 좋다.’는 말은 입을 가리고 턱을 괸 파이브의 손바닥 위로 흩어졌다. 클라우스는 낡고 헤진 두루주머니를 아직도 가지고 있다.

3-4.
네가 왕인 게 싫다는 말을 들었던 날, 사실 파이브는 속상했다. 도무지 펴지지 않는 미간으로 내의원으로 가는 길에 마주친 루서에게 네가 왕을 하라고 했다가 루서가 팔자 눈썹을 하고 달아나버렸다. 한심한 놈이라 혀를 차고 파이브는 걸음을 재촉했다. 적어도 제가 왕이 되면, 제가 임금이라는 이유로 클라우스가 속상할 일은 만들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며.

4.
벤은 다양한 공부를 하는 것이 좋았고 하여 어디서 구했는지도 모를 서책을 항상 손에 쥐고 다녔다. 유생일 때부터 언제나 다른 나라에 가고자 했는데 훗날 유생의 신분을 졸업하고 관직에 올랐을 때 그는 기어코 외교사절을 맡아 다른 나라를 떠돌고는 했다.

4-1.
클라우스는 벤이 사절단으로 다른 나라로 떠날 때마다 울고불고 난리를 피웠고 파이브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벤만큼 외교사절에 능한 자가 없어 수가 없었다. 벤이 떠나고 눈이 퉁퉁 부어 골이 난 클라우스에게 파이브는 예쁘고 맛이 좋은 한과나 장신구를 보내서 그를 달래고는 했다.

5.
디에고는 파이브를 싫어한다. 못된 소리를 너무 막 뱉어대서. 밤에 제집에서 홀로 이불을 걷어차며 저주의 말을 내뱉고서는 혹시 들었을까 무서워했던 어린 시절도 있었다. 그 뒤로 습관이 되어 지금까지도 파이브를 향한 속된 말은 속으로만 삼킨다.

6.
디에고는 이상하게도(루서의 표현이다.)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은데 그는 마음에 순정을 품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좋아했던 유도라라는 이름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훗날 다모가 되었다. 내금위까지 올라간 디에고이기에 그의 혼인은 가능한 화려한 집안과 이뤄지기를, 그의 부모는 바랐다. 하여 마음에 품은 순정으로만 그쳐야 했다.

6-1.
오래도록 말이다.

7.
앨리슨은 클라우스의 누이이며 바냐는 벤의 누이이다. 두 사람은 사이가 좋았고 클라우스는 두 사람과 사이가 좋았다. 바냐는 벤과 대화가 많지 않아 그저 그런 사이로 보였지만 벤은 바냐를 퍽 아낀다. 그 예로, 방정하지 못한 클라우스가 바냐와 사이가 좋은 것을 늘 못마땅하게 여겼다.

7-1.
아니, 여긴다고 생각했다. 벤과 바냐의 부모님이 말이다. 벤과 바냐의 부모님은 집안이 좋은 클라우스와 바냐를 혼인시키고 싶어 했다. 벤이 못마땅한 것은 바로 그 점이었는데 그들은 결코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7-2.
다행인지 불행인지 바냐에게는 정혼자가 생겼다. 다만 이렇다 할 부부생활을 하기도 전에 사내가 죽고, 사내의 부모가 일찍이 세상을 떠났기에 바냐는 열녀로 남았다. 바냐는 덕분에 자유롭게 지낼 수 있어 안심했다. 그녀는 다른 지방에 사는 친우를 보러 종종 여행을 가고는 했다.

7-3.
그 친우의 이름은 씨시다. 훗날 어찌나 기구한 인연인지 그녀 또한 열녀로 남게 되어, 말을 하지 못하는 어린 아들과 함께 바냐의 집에서 함께 지내게 되었다.

8.
앨리슨은 다른 가문과의 혼담이 오갔으나 결국 루서와 혼인했다. 둘은 어렸을 때부터 남몰래 마음을 키워왔다. 앨리슨의 혼담이 오갈 무렵 루서는 매일 울었다. 디에고랑 파이브가 드물게 마음이 맞아 놀려 먹고는 했다. 디에고는 그냥 가게 내버려 둘 거냐고, 어찌 된 일인지 루서를 응원했다. 위치를 이용해서라도 혼인을 종용하라 하였지만 루서는 그 혼담이 앨리슨이 원하는 길이라면 순리에 맞게 흘러가도록 둬야 한다고 생각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8-1.
그저 루서의 베갯잇만 젖어갈 무렵 루서에게 제 아비에게 혼인을 허해달라 이르라 한 것은 앨리슨이었다. 그에 앞서 아버지에게 다른 가문과의 혼인을 원치 않는다고 말한 것 또한 앨리슨이었다. 둘은 슬하에 두 오누이를 두고 행복하게 살았다.

9.
클라우스와 벤은 어릴 때부터 친우였다. 둘의 아버지 또한 그러했다. 하여 그저 구름 따라 바람 따라 붓이나 놀리고 시구나 읊으며 한량처럼 놀고먹고 싶었던 클라우스가 유생이 되고자 마음을 먹은 데에는 벤의 역할이 컸다.

10.
클라우스는 성적은 좋으나 행실은 좋지 못했다. 저잣거리에서 양갓집 규수는 물론이거니와 기생들과도 노닥거리기 일쑤라 때로 문제가 되고는 했다. 행색 또한 화려하여 눈살을 찌푸리는 이가 많았는데 그는 물론 여인에 그치지 않고 사내들과도 두루두루 사이가 좋아 노상 붙어있는 통에 여러 이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는 했다. 그런 자들은 파이브에게 반드시 혼이 났다. 양반 된 자가, 무릇 양반이란, 이런 소리를 늘어놓으며 입방아를 찧은 자들에게 호통을 쳤고, 클라우스와 함께 방탕하게 군 자들 또한 호통을 들어야 했다.

10-1.
그 두 무리가 호통을 듣고 나면 클라우스는 따로 불려가 혼나야 했다. 클라우스는 오히려 파이브와 둘이 있을 수 있어서 좋다거나, 요즘 너무 바빠서 통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며 반기거나 여하튼지 오히려 혼이 나는 것을 즐겨 그 또한 파이브의 골칫거리였다.

11.
파이브는 성균관을 졸업하지 못하였다. 선왕이 승하하여 왕위를 물려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비록 유생으로 지낸 시절은 짧아도 파이브에게는 좋은 기억이었기에 그는 유생들을 눈에 띄게 아꼈다. 정사의 대소사가 막힐 때나 골치 아픈 사건 등이 있을 때도 그들을 불러모아 문제를 푸는데에 도움을 준 이에게는 막대한 상을 내리겠다 할 정도였다.

11-1.
클라우스에게는 그 상이 승은일 때도 있었다.

11-2.
클라우스는 의외로 사건 해결에 큰 도움이 되었다. 게 중 살인사건에서는 포도청에서도 쉬이 알기 어려운 정보를 가져오고는 해 오해를 받기도 했지만, 워낙 발이 넓다 보니 결국 정보가 많은 게 당연하다 여겨지고는 했다. 사실 클라우스는 죽은 자를 볼 수 있었고 그가 가져온 정보는 9.9할이 죽은 자들을 통한 것이었다. 하지만 부모도, 누이인 앨리슨도 클라우스가 죽은 자를 본다는 건 알지 못했다. 그 사실을 아는 자는 오로지 벤뿐이었다.

11-3.
벤은 그 사실에 묘한 우월감을 느꼈다. 왕인 파이브가 모르는 것을 저는 알고 있었다. ‘왕’이 몰라서 우월감을 느끼는 게 아니었다. ‘파이브’가 모른다는 것에 벤은 기뻤다. 왕인 파이브는 원한다면 얼마든지 클라우스를 쥐고 저만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것이 파이브가 가진 우월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벤은 죽는 날까지도 그 사실을 저만 알고 있기를 원했다. 클라우스는 어린 시절 지나치듯 했던 벤과의 약조를 죽는 날까지 지켰다.

12.
파이브는 후손을 남기지 않았다. 그는 후손은커녕 후궁도, 후궁은커녕 정비도 두지 않았다. 훗날 그의 뒤를 이은 것은 루서와 앨리슨의 둘째로 태어난 사내아이였다. 클라우스는 너와 같은 사람이 너로 끝이라니 아쉽다고 했지만 그 말이 온전히 진심이 아니라는 걸 파이브는 알고 있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안으면 네가 울 거, 알고 있다.’
파이브는 그렇게 말하고 클라우스의 손을 어루만졌다. 벤이 고할 것이 있다고 찾아오는 바람에 금세 놓아야 했기에 파이브는 벤이 말하는 동안 내내 아쉬운 듯 제 손끝을 스친 온기를 찾아 손가락을 비볐다. 클라우스는 둘의 이야기가 무거워지자 머리 아픈 이야기는 싫다며 일찍 자리를 털고 나가버렸는데 길에서 만난 기녀들에게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인다는 말을 몇 번이나 들었다.

13.
벤은 클라우스에게 자주 호통치고 종종 무시했다. 그리고 언제나 그를 돌보았다. 클라우스는 그게 좋아 자꾸 벤을 귀찮게 굴다가 벤이 정말로 화가 나면 아무랑도 어울리지 않고 혼자 기가 죽어 그의 방문 앞에 앉아있고는 했다.

13-1.
3척은 넘어 보이는 다리를 쭉 펴고 앉아 입을 댓 발 내민 채 풀이 죽어있는 걸 독창을 슬며시 열어 지켜보던 벤은 결국 못 이기는 척 방문을 열고 클라우스를 향해 얼른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지는 자 없는 항의는 늘 클라우스의 투정으로 끝났다.

14.
파이브는 갓 왕위에 오른 어린 왕이었던 때에 클라우스에게 얼른 자라 제 곁에 오라고 말한 적이 있다. 클라우스는 그 말을 듣고 ‘자기도 어린 주제에?’라고 생각을 했다가 그 생각이 고스란히 입 밖으로 나와버려서 푹신한 비단 방석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오랜 시간 혼이 나야 했다.

14-1.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클라우스는 성균관을 졸업하기 전까지도 밥 먹듯 임금에게 혼이 나고 밤늦게서야 들어오는 통에 아침도 거르고 뻗어서 잠을 자기도 했다. 그럴 때면 벤이 깊은 한숨을 쉬고 속된 말을 뱉고는 도기에 대신 기록을 받아주기도 했다. 클라우스는 엄격하게 관리되던 도기에 어떻게 대신 기록을 받아주었는지 신통할 노릇이라고 항상 생각했고 아직도 어찌 된 방도인지 모른다.

15.
디에고는 결국 부모님을 설득해 유도라와 혼례를 올렸다.

15-1.
디에고는 혼례식에서 울었다. 그의 혼례식을 보기 위해 잠행을 나왔던 파이브와 루서가 그걸 보고 수일을 놀려댔다.

16.
디에고의 전립이 지나치게 화려해지는 날은 클라우스의 기분이 좋지 않았던 다음 날일 때가 많았다. 처음에는 파이브가 클라우스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수많은 장신구를 던져주고 마음대로 꾸미라 하였고 나중에는 디에고가 종종 제 손으로 전립을 건네는 날도 있었다.

16-1.
말도 안 되는 장식일 때도 있었지만 디에고는 이제 익숙해져서 아무렇지 않게 전립을 쓰고 다닌다. 디에고의 전립을 놀렸다가 혼쭐이 난 자들의 소문이 궁내에 자자하여 누구도 입을 대지 않는다.

17.
클라우스는 가끔 기생들이나 입을 법한 화려한 여인들의 옷에 전모까지 걸치고 파이브 앞에서 재롱을 부리고는 했다. 다음날 클라우스는 대개 지밀에서 오시까지 늘어지게 잠을 자고는 했다.

17-1.
왕의 지밀에 출입이 가능한 자는 지밀상궁과 그에 따른 궁녀들을 제외하고는 오로지 클라우스뿐이었다.

18.
정사에 아무리 능하다 한들 전쟁이 없을 수는 없었다. 임금인 파이브가 직접 전쟁에 출정하는 일도 있었는데 무예와는 무관했던 클라우스는 하염없이 기다리는 일밖에 하지 못했다. 따라가려 해도 다른 건 무얼 해도 내버려 두는 파이브가 그것만큼은 강경하게 막았기 때문이다. 벤마저도 참모로 함께 다니고는 했기 때문에 앨리슨과 바냐가 클라우스를 다독이며 함께 기다려주고는 했다.

18-1.
클라우스는 다쳐서 돌아오면 혼난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서 파이브를 꼭 웃는 얼굴로 출정하게 했는데(웃는 얼굴로 가야 웃는 얼굴로 돌아올 수 있어, 같은 역시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으며 말이다. 정작 본인은 파이브가 웃는 얼굴로 보내 달라고 해도 울며 보냈다.) 돌아온 파이브에게 전쟁 중에 팔이 베였다던가 그런 목숨과는 무관한, 시답잖은(적어도 파이브는 그렇게 말했다.) 상처라도 있으면 클라우스는 세상이 망한 것처럼 울며 수일을 파이브가 어디를 가나 졸졸 쫓아다니고는 했다.

19.
파이브, 클라우스, 벤은 혼례에는 뜻이 없다는 것을, 셋 다 아주 확고하게 뜻을 밝혀 결국 생이 끝나는 날까지도 그들은 혼자였다. 적어도 다른 이들은 그리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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