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원의 귀신
- 샤민 @shaminnnnnnn
우산관 유생들 전체
그레이스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안 그래도 심란한데 어디선가 들리는 큰소리에 고개를 들고 은은한 달빛이 비치는 창을 밀어 열자 의문의 소란이 더욱 똑똑히 들려왔다. 안채에까지 들릴 정도의 무례에 미간을 찌푸리던 그레이스의 뇌리에 문득 어젯밤과 같은 변고가 또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치자 그레이스는 어느새 안방을 박차고 대문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미안하다고 했잖소. 귀신인 줄 알았다니까!”
“이 작자가 아직도 요사스러운 소리를...!”
“무슨 일이냐?”
“아, 어르신! 송구합니다. 여기 이 한량 같은 인간 때문에 큰어르신 관뚜껑이 부서졌습니다!”
“아니, 앞뒤 다 잘라먹고 그것만 말씀하시면 어떡하오?!”
평소 같았으면 대문 밖에서 벌어진 실랑이는 무시했을 그레이스였으나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그럴 수 없었다. 게다가 관뚜껑이 부서지다니? 그레이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문지기에게 뒷덜미를 잡혀 있는 낯선 이를 살펴보았다. 눈동자 색과 비슷한 옥빛 도포에 갓까지 갖춘 차림새지만 왠지 어수선해 보이는 짧은 수염의 남자는 열심히 손을 저으며 자신을 변호했다.
사건의 경위는 단순했다. 이 낯선 자가 문지기와 부딪쳤는데, 예민한 문지기는 대문 앞 널찍한 길을 놔두고 굳이 이쪽으로 다가와 몸을 부딪친 것을 고의적인 시비로 받아들여 대거리를 했고, 역시 어수선한 동작으로 그게 아니라고 해명하던 낯선 이의 팔이 하필 관을 들고 마침 옆을 지나가던 일꾼 한 명을 치는 바람에 그들이 줄줄이 넘어져 관도 함께 추락하여...
...관이 비어 있어서, 그 난리가 났는데 뚜껑만 부서져서, 어쨌든 다친 사람은 없어서, 그레이스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낯선 이는 기죽은 모습으로 공손히 손을 모으고 그레이스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관은 제가 어떻게든 보상을... 보상을... 당장은 여비가 좀 부족하지만 금방 벌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정말 일부러 그런 게 아닌 건 알아주십시오. 지금 여기 안 보이시겠지만 이 길가가 귀신들로 빽빽이 차 있어서...”
“어허, 이 자가 또!”
“잠깐.”
그레이스는 손을 들어 문지기를 진정시키고 낯선 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정확히는, 길가로 뻗어진 낯선 이의 손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양 손바닥에 마치 부적처럼 큼직한 글씨의 문신이 있었다.
“혹시... 한양 분 아니십니까? 포도청에서 해결 못한 사건을 여러 차례 해결하셨다는... 실례합니다. 존함이 기억나질 않는군요.”
“아... 예! 혹시 ‘귀신 보는 해결사’니 뭐니 하는 걸 들으셨다면 제가 맞는 것 같습니다.”
그레이스가 알은체를 하자 낯선 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고 문지기는 명석한 어르신이 귀신 따위의 황당한 소리에 고개를 끄덕이는 걸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라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레이스는 낯선 이가 허겁지겁 품에서 꺼내 건넨 호패를 받아들었다.
“맞습니다. 이 이름이었던 것 같네요, 클라우스 카츠. 엘리엇의 무례는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아이고, 아닙니다! 자주 있는 일인걸요. 그리고 저 때문에... 저게 부서진 게 사실이기도 하고...”
클라우스라는 이름의 사내에게 오히려 그레이스가 머리를 숙이자 문지기 엘리엇은 안색까지 창백해졌다.
“헌데, 여기에 정말 그렇게 귀신이 많습니까?”
“예...에. 그런데 걱정하실 건 없습니다! 보아하니 초상이 궁금해서 몰려든 잡귀들이라 며칠 지나면 싹 돌아갈 겁니다.”
“죽은 사람과 정말 대화가 가능하신지요.”
“상대에게도 대화할 의지가 있다면요. 물론 그건 산 사람도 마찬가지이지요.”
그레이스는 이미 클라우스 손의 문신을 봤을 때부터 떠올린 제안을 입 밖으로 드러낼까 고민했고 그 기색을 눈치챈 클라우스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딱 봐도 이 집에서는 최근 사람이 죽었고(아마 클라우스가 뚜껑을 부숴 먹은 관의 주인이리라) 이 어르신은 죽은 자에게 볼일이 있는 듯했으니 부탁을 들어주고 관 값을 흥정할 수 있겠다는 결론에 빠르게 다다랐다.
잠시 후 그레이스는 과연 클라우스의 예상대로 영매를 부탁했다. 상대는 지난밤 이 저택의 후원에서 죽은 가주, 레지널드 하그리브스. 레지널드와 그레이스는 종남매였고, 지역 유지이자 학자들로서 친척이라기보다는 동료 같은 관계였다. 어제 레지널드의 심부름으로 그레이스가 잠깐 출타했다가 돌아온 그 짧은 새에, 멀쩡히 살아 있던 레지널드는 끔찍한 시신이 되어 후원에 조각나 있었다.
“명백히 살해당한 듯한 모습이라 오늘 종일 관아에서 수사를 했습니다만... 짐승에게 당한 것으로 결론을 지었습니다.”
“어제 작고하지 않으셨습니까? 성급한 결론처럼 들리는데요.”
“그래서 선생께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늦었으니 일단 주무시고 내일 자세한 말씀 나누시지요. 수랑으로 모시겠습니다.”
“아, 귀댁에서 하룻밤 묵어도 되겠습니까?”
클라우스의 얼굴에 또 한 번 화색이 돌더니 누군가와 눈맞춤을 하듯 허공을 보고 웃어서 엘리엇은 오싹하게 소름이 돋았다. 정말? 귀신 따위가 실존하며, 이 자는 그걸 본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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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 기침하셨습니까.”
다음날 아침 엘리엇이 객실 밖에서 인사를 올리자 잠시 후 클라우스가 문을 열었다. 클라우스의 머리는 방금 깨어난 사람처럼 까치집이었으나 의복은 그럭저럭 갖춰 입고 있었다. 클라우스는 어제 잠깐 본 엘리엇도 아는 얼굴이라고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가 곧바로 갸웃거렸다.
“문지기 아니셨소? 존함이... 뭐라셨더라. 미안하오, 아침형 인간이 아니라.”
“엘리엇입니다. 원래는 행랑에 머물면서 허드렛일하는 하인입니다만, 어제는 난리 때문에 일손이 부족해서 대문을 지키고 있었습죠. 그... 어제의 무례는 용서해 주십시오.”
“아유, 아니라니까. 내가 한량처럼 보이는 것 알고 있소.”
엘리엇은 클라우스가 고도의 비꼬기를 구사하는 것인가 긴장했으나 올려다본 클라우스의 표정은 그저 평화로웠다. 나른히 웃다가 기지개를 켠 클라우스가 마루로 나와 앉아 신을 신자 엘리엇이 슬쩍 다가갔다. 엘리엇은 몰랐는데 클라우스가 정말 유명한 자였는지 행랑 하인들과 클라우스에 대한 얘기를 하느라 밤을 꼴딱 샌 다음이라 클라우스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했다.
“어제는 누구신지 몰라뵀는데, 그 원수지간이었던 승지 나리들 화해시킨 게 클라우스 나리시라면서요? 그 사건은 소인네도 들어 봤습니다!”
엘리엇의 열띤 목소리에 클라우스는 잠시 허공을 쳐다봤다가 기억난 듯 감탄사를 내뱉으며 미소를 지었다.
“앨리슨 승지와 루서 승지 말씀이시오? 그네들 알고 보니 죽마지우였던지라... 승지들 고향의 귀신이 귀띔을 해 준 덕이지. 웬 썩은 핏물 같은 게 담긴 호리병을 찾아 보여 줬더니 그네들의 추억이 담긴 진달래화채라며 알아서 화해하더이다.”
“허어...! 그것참, 신기합니다. 괴팍한 참판 나리도 클라우스 나리께 납작 엎드렸다고요?”
“참판... 파이브 영감? 에이, 와전된 것이오. 내가 아니라 영감의 귀애하는 돌로레스 낭자에게 엎드린 건데 남들 눈에는 나한테 엎드린 것처럼 보인 게지. 요절한 연인인데 늘 곁에 있겠다는 증좌로 인형 하나 안겨 드리니까 그 괴팍한 영감도 웃기는 했소.”
“우와아...! 또, 또, 디에고 만호의 가슴앓이를 풀어 주기도 하셨지요?”
“아아. 사별한 부인이 디에고 만호에게 재취해도 개의치 않는다고 했으니. 그런데 정작 재취하려던 상대방이 거절하고 사라지는 바람에 가슴앓이가 풀렸다고 하긴 뭐하오.”
끝 모를 듯 쏟아지는 엘리엇의 질문 세례에 클라우스는 소리 내어 웃어 가며 대답을 계속했다. 어제까지 귀신을 믿지 않았다고 하기 민망할 정도였으나 엘리엇은 그 신묘한 일화들에 완전히 사로잡혀 너무 흥분한 나머지,
“아, 나리께서도 사별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전혀 감탄스럽지 않은 말을 감탄스럽게 내뱉어 버렸다. 자기가 한 말을 제 귀로 들은 엘리엇은 바로 입을 틀어막고 클라우스의 눈치를 살폈으나 클라우스는 조금도 상처받거나 슬퍼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능청스럽게 말을 이었다.
“‘사’는 맞는데 ‘별’은 아니라오. 내 지아비는 바로 여기 있으니까. 그렇지, 데이브?”
‘클라우스.’
클라우스는 항상 거기에 있었던 데이브와 눈을 마주쳤다. 여태 실컷 귀신 얘기를 해 놓고 막상 옆에 진짜 귀신이 있다고 하자 얼어붙는 엘리엇 때문에 데이브는 웃음을 터뜨렸고 클라우스는 데이브의 웃는 얼굴에 대략 16783번째로 반하고 있었다.
“우리 데이브 이 잘생긴 얼굴 나만 봐서 얼마나 아쉬운지...”
“아... 예에... 여하튼 정말 대단하십니다. 무당 같은 거 다 사기인 줄 알았는데.”
“엄밀히 말하면 나는 무당이랑 완전히 반대요. 그네들은 귀신을 쫓아내지만-”
클라우스는 양손으로 허공을 밀어내는 자세를 취했다가,
“-나는 불러내니까.”
다시 끌어당기는 자세를 취하며 주먹을 쥐었다. 엘리엇이 그 손짓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이자 클라우스는 빙긋 웃으며 걸음을 뗐다.
“그래서 말인데, 이 집안이나 사건, 망자에 대한 얘기를 좀 더 해 줄 수 있겠소? 내가 그 ‘큰어르신’을 불러내서 대화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오.”
엘리엇은 다시 한 번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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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널드에게는 바냐라는 딸이 있다. 한때는 벤이라는 아들도 있었다. 똑똑하고 다정한 도련님이었기에 가족들은 물론 하인들도 벤을 좋아했으나 수년 전 다소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벤과 바냐의 모친인 애비게일 또한 바냐가 기억도 못할 만큼 어린 나이에 병사했기에 사람들은 벤이 어미의 병약한 성질을 닮았었나 보라고 안타까워했다.
하그리브스 저택의 후원은 바로 그 벤이 며칠 앓다가 죽은 곳이었다. 어쩐지 슬프고 음산한 생각에 이후로 사람들은 후원에 발길을 끊었으나 바냐만은 후원을 제 방처럼 자주 들락거렸다. 후원에서 벤의 귀신을 봤다는 사람들이 종종 나타나는데도 바냐는 오라비의 귀신이라면 무섭지 않다며 후원의 별당에서 식사도 하고 아예 밤을 보낼 때도 있었다. 기억도 안 나는 어미와 엄한 아비 대신 오라비에게 의지했기에 그리워서 그럴 거라고, 사람들은 바냐도 안타까워했다.
이렇듯 바냐가 후원의 거의 유일한 출입자였기에 레지널드 살해의 제일 용의자로 지목되었으나 혐의는 빠르게도 벗겨졌다. 우선 그레이스가 레지널드의 시신을 발견했을 때 레지널드는 갓 죽은 듯한 상태였는데 바냐는 그레이스의 비명을 듣고 뒤늦게 후원에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만약 후원에서 레지널드를 살해하고 나왔다면 그전에 그레이스와 마주쳤어야 했다. 출입문이 아닌 담을 넘어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왔을 수는 없겠느냐는 수령의 의문은 후원 담의 높은 높이와 바냐의 작은 키를 보고 종식되었다.
시신의 모양새도 바냐의 짓으로 보긴 어려웠다. 관아에서 짐승의 짓이라고 결론을 내렸으나 기실 웬만한 짐승도 육신을 이렇게 찢어 놓을 수 없다는 걸 모두 알았다. 굳이 논하자면 거열형이라도 받은 듯한 형체인데 도저히 그게 가능한 공간적 환경도 아니고 시간적 여유도 없었기에 사건은 그야말로 미궁이었다.
당시 그레이스는 충격에서 조금 회복되자마자 역시 충격받은 바냐를 안고 진정시켰고, 즉시 하인들을 시켜 관아에 도움을 청하도록 했다. 병졸들은 혹시라도 아직 집안에 숨어 있을지 모르는 범인의 도주를 막기 위해 저택을 둘러쌌고 안팎을 수색했으나 마땅한 단서를 찾지 못했다. 덜덜 떨면서도 후원을 수색하는 것을 도왔던 바냐는 그날도 별당에서 잠을 청했고, 다음날 한결 침착한 모습으로 그레이스의 곁을 지켰다.
오후가 다 지나도록 부진한 수사에 바냐는 그만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장례를 치러 드리자고 그레이스에게 제안했다. 빠르긴 했으나 더 이상 수색할 근거나 실마리가 없는 것도 사실이었고 이제는 바냐가 하그리브스의 가주였기에 그레이스는 어렵게 동의했다. 그래서 저녁부터는 관아 사람들은 물러가고 저택 사람들끼리 장례 준비를 시작했고, 밤에는 급하게 구한 고급 관이 집에 도착하려던 참이었으나...
“...하얗게 센 머리에 콧수염과 턱수염을 길렀고 단안경을 착용하신 분이 맞습니까? 외람되지만 상당히 깐깐한 인상이시고요.”
“...! 맞습니다. 지금 여기에 오신 겁니까?”
“예. 제대로 부른 것 같네요.”
‘자네는 누구인가?’
클라우스는 자신이 관뚜껑 박살의 도화선임을 레지널드가 모르는 눈치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대개 귀신들은 사후 대접에 과민한 경향이 있었다. 특히 초면에 하대하는 이런 부류는 더욱.
클라우스는 아침 식사 후 영매를 요청받았다. 나름대로 매무새를 정리하고 대청으로 가자 그레이스가 기다리고 있었고, 바냐와도 첫인사를 할 수 있었다. 지난해 계례를 치렀다는 이팔청춘 바냐는 성년이자 가주로서 클라우스에게 완벽한 예우를 갖추었으나 의심하는 눈초리를 완전히 거두지는 못했다. 클라우스는 그 의심 또한 충분히 이해했다. 어쨌든 클라우스가 레지널드를 불러내 외양을 묘사한 지금 그레이스와 바냐의 기겁에 가깝게 놀란 표정을 보면 이제는 의심을 거두었을 테니 상관없었다. 그전에 클라우스의 손이 빛난 걸 보고 놀란 걸 수도 있지만.
‘진술을 거부하겠다.’
“...예에?”
‘사람들은 내가 왜 죽었다고 생각하나?’
“짐승이 그랬다고 합니다만...”
‘그럼 짐승이 그런 것으로 하지.’
“아니, 어르신!”
세간에는 클라우스의 활약상이 알려져 있지만 당연히 잘 풀린 일만 있진 않았다. 귀신도 결국 사람이라 가끔 이렇게 전혀 협조하지 않거나 도리어 거짓말로 클라우스를 골탕 먹이는 영혼들이 있었다. 벌써 하그리브스 집안에 기물 파손과 하루 숙식이라는 빚을 진 입장에서 제발 레지널드는 그러지 않길 바랐으나 클라우스를 내려다보는 레지널드의 시선은 차갑디 차가웠다. 클라우스가 허공을 보고 난감한 얼굴로 허둥거리자 옆에서 지켜보던 그레이스와 바냐의 표정도 안 좋아져 갔다.
“...말씀을 안 하신답니까?”
“예? 아, 예. 근데 제가 어떻게든 여쭤보겠습니다. 지금 기분이 안 좋으신 걸 수도-”
“아뇨. 한 번 마음먹으셨으면 웬만해선 번복하지 않으실 겁니다.”
클라우스가 뭐라고 변명을 하기도 전에 그레이스가 먼저 나직하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레이스는 결연하면서도 조금 슬퍼 보였고, 바냐는 심란한 듯 바닥만 쳐다보고 있었다. 클라우스는 죽어서까지 대화를 거부하는 가족을 둔 그들의 심정이 어떨지 상상하며 덩달아 기분이 처졌다. 레지널드라는 인간은 대체 얼마나 냉혈한이었기에 저들을 보면서도 입을 다물고 있을 수가 있지?!
클라우스가 애원했다가 바락 소리쳤다가 빛나는 주먹을 방방 휘두르는 걸 잠잠히 보던 그레이스는 클라우스가 기어코 눈물까지 찔끔 흘리자 이제 그만 됐다며 클라우스를 말렸다.
“하, 하지만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는데요...”
“오라버니의 뜻은 알았으니 충분합니다. 아무 말씀을 않으신다는 건 작금의 결정에 동의한다는 것이겠지요. 수고하셨습니다. 조금 힘들어 보이시는데 불편하지 않으면 며칠 더 머무르다 가셔도 좋습니다.”
클라우스는 그레이스의 친절에 할 말을 잃고 눈만 껌뻑댔고 그레이스는 금방 대청을 떠났다. 레지널드의 귀신은 진작 떠났고 다소 허무해 보이던 바냐까지 일어서 나가려 할 때에야 클라우스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 주먹을 쥐었다.
‘클라우스, 무리하지 마.’
“이 정도는 괜찮아, 데이브. 나 이분들을 돕고 싶어.”
“...뭐하시는 건가요?”
클라우스가 또 손을 빛내자 문간을 지나던 바냐는 멈칫하고 클라우스를 돌아보았다.
“당사자가 말을 안 하면, 목격자라는 게 있습니다. 어르신이 후원에서 돌아가셨지요? 그렇다면 후원에 있을 법한 귀신에게 물어보면 됩니다.”
“지금 누굴 말씀하시는 겁니까? 설마-”
“벤 도련님이요.”
애초에 이런 비상 상황을 위해 엘리엇에게 최대한 많은 얘기를 들어 둔 것이었다. 귀신과 소통하는 능력으로 남들을 도운 지도 어언 수년, 클라우스에게는 나름의 요령들이 생겼다. 하지만 그 얘기를 들은 바냐가 사색이 되어 뛰어와 클라우스를 밀쳐 넘어뜨린 것은 예상에 없었다.
“으아악?! 바냐 아가씨?!”
“제 오라비를 괴롭히지 마세요! 죽은 사람은 편히 쉬게 두란 말입니다!”
“저, 저는 망자를 괴롭히지 않습니다! 망자가 저를 괴롭히지요! 제가 말을 걸어 주면 그들이 얼마나 기뻐하는 줄 아십니까? 아주 좋아서 죽으려고 한단 말입니다, 이미 죽어서 또 죽을 수 없을 뿐이지.”
클라우스는 필사적으로 설명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바냐가 벤을 정말 좋아했나 보라고 생각했다. 방금 레지널드를 소환했을 때 꿈쩍도 안 하던 모습과 비교하면 지금의 바냐는 얼마나 더 안쓰러워 보이는지, 이들을 돕겠다는 클라우스의 마음은 더 강해졌다.
“아가씨... 아니, 가주 어르신. 걱정하시는 마음 잘 알겠지만 이건 정말 그런 게 아닙니다. 심지어 벤 도련님이 제가 부르고 나면 돌아가지 않겠다고 제 곁에 붙어 계실지도 모르지요.”
“...”
“영... 안 내키시면 안 하겠습니다만, 전 정말 돕고 싶을 뿐입니다.”
“...맘대로 하십시오, 그럼.”
마지못해 허락한 바냐는 아까의 예의 바른 태도 대신 팔짱을 끼고 클라우스를 지켜봤으나 클라우스는 괘념치 않고 활짝 웃으며 감사 인사를 하고 다시 자세를 잡았다. 이번엔 실망시키지 말아야지, 생각하며 손을 빛냈으나...
“...음. 바냐 어르신, 혹 제가 후원을 둘러봐도 되겠습니까?”
“왜요?”
“면구스럽습니다만, 도련님이 나타나질 않으시네요. 하하...”
클라우스는 머리를 긁으며 머쓱하게 웃다가 바냐가 반응이 없자 얼른 웃음을 거두고 헛기침을 했다.
“제가 불러도 귀신이 나타나지 않을 땐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지금은 벤 도련님이 지박령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가장 유력합니다. 하지만 후원은 가까우니까! 그냥 제가 직접 가서 찾아뵈면 될 듯합니다.”
“불허합니다.”
손뼉까지 쳐 가며 산뜻하게 말한 클라우스였으나 바냐는 단호히 거절했다. 힘이 쭉 빠진 클라우스가 더 어떻게 설득을 해야 하나 머리를 굴리는데 데이브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클라우스, 이분 수상해.’
“뭐? 아냐, 데이브! 알잖아, 가까운 사람이 죽으면 원래 좀 이상해 보일 수 있는 거야. 많이 긴장하고 겁먹었을 거라고.”
‘알아, 알아. 하지만 이대로는 이분들을 도우려야 도울 수도 없어.’
“그렇지만...”
“지금 누구와 말씀을 나누시는 겁니까?”
클라우스는 난처하게 데이브와 바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바냐가 수상하다고? 바냐에게는 클라우스가 수상해 보일 텐데. 데이브는 대체적으로 완벽하지만 클라우스를 너무 사랑하는 나머지 객관적인 눈이 부족하다고, 클라우스는 생각했다. 한숨을 쉬며 곤란해 하는 클라우스를 바냐는 계속 추궁했는데, 클라우스의 머릿속에 어떤 발상이 떠올랐다.
“저, 제 귀신 지아비랑 대화 중이었는데요.”
“...예?”
“제가 안 된다면 제 지아비가 후원에 다녀오는 것은 괜찮겠지요? 우리 데이브는 정말, 정말 상냥한 귀신이어서 벤 도련님도 좋아하실 겁니다.”
“무... 뭐요?”
‘뭐? 클라우스, 안 돼. 널 두고 나만 갈 수 없어.’
데이브는 클라우스의 곁에서 절대 떨어지지 않았다. 데이브는 살아 있을 때나 죽은 후에나 한결같이 클라우스를 지켰고 한때는 클라우스도 데이브와 떨어지는 걸 죽기보다 두려워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도 꽤 예전 일이었다.
“괜찮아, 데이브. 멀리 가는 것도 아니잖아. 나도 어른인걸!”
‘클라우스...’
정말 갓 어른이 된 바냐가 듣기에 클라우스의 새삼스러운 어른 선언이 얼마나 어색할지 조금 신경쓰이기도 했지만 지금 클라우스는 아직도 클라우스를 어린아이로 알고 있는 데이브를 안심시키는 게 먼저였다.
“나 믿지?”
‘...빨리 갔다 올게. 위험하거나 힘들거나 무서우면 바로 다시 불러야 해.’
“응, 고마워! 잘 다녀와!”
“...지금, 지금 귀신... 부군께서 후원으로 가신 겁니까? 정말?”
“예.”
간명한 대답에 바냐는 기가 찬 듯 또는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짓다가 몸을 돌려 나갔고 클라우스는 잠시 머뭇대다가 잰걸음으로 바냐를 따라갔다. 클라우스가 따라오는 걸 알아채자 바냐는 확실하게 당황한 얼굴이 되었고 클라우스는 급히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정말 죄송하지만, 어르신. 잠깐만 같이 있어 주시면 안 될까요?”
“예?”
“제가 데이브한테는 큰소리를 쳤는데 솔직히 지금 여기... 귀신이 많아도 너무 많아서요. 초상집이라고 아주 신들 났습니다.”
“아니, 무슨...”
“예? 잘 안 들립니다. 누가 귀에다 대고 소리를 지르고 있어서요.”
“......”
할 말을 잃은 바냐는 몇 번 입을 떼려다 포기하고 가던 길을 마저 갔다. 뒤에서 클라우스가 졸졸 따라오는 게 느껴졌으나 지금 그걸 신경쓸 때가 아니었다. 어차피 클라우스와 가까운 귀신이 정말 후원에 갔고 자신이 본 것을 그대로 클라우스에게 전할 수 있다면 클라우스가 후원에 직접 가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바냐는 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생각하며 후원으로 나아갔다. 벤이라면 어떻게 할까?...
“여기부터는 정말로 그만 따라오십시-”
후원으로의 통로 앞에 다다른 바냐가 획 돌아서며 단호하게 말하려 했으나 클라우스는 이미 수십 자 떨어진 곳에 멈춰 서 있었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의아한 표정을 짓는 클라우스에 바냐도 의아해 하다가 곧 클라우스가 반색을 하며 “데이브!”를 외치자 정신을 차렸다. 클라우스는 “응. 응. 뭐?” 등의 소리를 내며 귀신의 말을 듣고 있는 것으로 보였고 바냐는 지금 어서 별당으로 달려가야 할지 클라우스를 두고 봐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바냐가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던 어느 순간 마침내 클라우스가 바냐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가주 어르신. 별당에 뭐가 있습니까?”
“예, 예?”
“바깥부터 안까지 귀신들이 그득했던 초상집인데 이 후원에 가까워지자 거짓말처럼 귀신들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아서 이상했습니다. 후원 안에 어쩔 수 없이 묶여 있는 지박령 몇 빼고는 모두 도망갔다는데, 그 귀신들이 말하길 귀신보다 더 무서운 존재가 레지널드 어르신을 해쳤다고 했다는군요.”
“무, 무슨... 귀신보다 무서운 존재가 뭐란 말입니까.”
“모르겠습니다. 거대한 촉수 귀신이라는데 도대체 무슨 얘기인지. 귀신들이 헛소리를 자주 하니까 이건 넘어가고요. 하여튼 그렇게 무시무시한 게 별당에 있다는데... 데이브 눈에는 그냥 살아 있는 사람처럼 보였답니다.”
“...허무맹랑한 말씀이십니다. 별당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귀신들이 헛소리를 자주 한다면 부군께서도 그러고 계신 건 아닌지요?”
“데이브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클라우스, 진정해.’
자신이 홀대당하는 건 익숙해도 데이브가 비난받는 것은 조금도 참지 못하는 클라우스였다. 확실히 순식간에 흥분했고, 옆에서 데이브가 다독여 주지 않았다면 바냐 또한 만만치 않게 초조해 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할 뻔했다. 클라우스는 심호흡을 하고 다시 차분히 물었다.
“뭔가를 알고 계신 게지요. 별당에 있는 저 사람인지 귀신인지 귀신보다 더한 존재인지에 대해서요.”
“별당에는 아무것도 없고 저는 이만 선생께서 나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고모님은 머물라고 하셨지만 가주는 저니까요.”
“대체 뭔데 그러십니까? 뭐, 정인이라도 숨겨 두신 겁니까?”
“흉측한 말씀 마십시오! 저는 따로 좋아하는 처자가 있습니다!”
“‘따로’? 그러니까 저 안에도 뭐가 있긴 있단 뜻이시지요?”
언성을 높이던 바냐는 실언을 인지하고 입을 꾹 다물었고 클라우스는 바냐가 진실을 말해 주길 바라며 똑같이 입을 다물고 기다렸다. 바냐가 마음의 준비가 될 때까지 얼마든 조용히 있을 생각이었으나, 데이브가 속삭인 타당한 추측에 클라우스는 곧 헛숨을 들이켜며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클라우스의 경악한 모습에 바냐의 눈동자가 숨길 수 없이 흔들렸다.
“저, 별당의 그 촉수 귀신이... 돌아가신 벤 도련님입니까?”
“...아닙니다.”
“허어. 아니라잖아, 데이브. 깜짝 놀랐네.”
‘아니, 클라우스, 그렇게 단박에 납득하지 말고 앞뒤를 생각해 보면...’
바냐는 클라우스가 허공에 대고 가볍게 투닥거리는 걸 보고 긴장이 풀려 짧게 숨을 내쉬었다. 사실 클라우스가 바냐를, 하그리브스를 돕고 싶어한다는 마음은 충분히 알아차렸다. 하지만 이건 오늘 처음 본 남에게 쉽사리 고백할 문제가 아니었다. 바냐는 혼자 찡찡대는 클라우스에게서 시선을 떼고 후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별당에서 언제 나온 것인지, 통로 너머의 정원에서 벤이 바냐를 쳐다보고 있었다.
벤과 바냐는 시선을 교환했다. 의도치 않았지만 시끄러운 언쟁이었던 탓에 벤은 바냐와 클라우스의 대화를 대부분 들은 듯했다. 바냐가 벤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은 것 이상으로 벤도 곤경에 빠진 바냐를 그냥 둘 수 없었다. 바냐가 설레설레 고개를 젓는데도 벤은 다짐한 듯 천천히 걸어 나왔다. 바냐는 자신이 망쳤다는 생각에 괴로워 눈을 꽉 감았으나 벤은 곧 다른 이유로 걸음을 우뚝 멈췄다.
“벤?”
바냐는 등뒤에서 들린 익숙한 목소리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눈을 번쩍 떴다. 눈앞의 벤 또한 놀란 표정으로 바냐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냐는 느리게 몸을 돌려, 벤보다 훨씬 놀란 표정의 그레이스를 마주했다. 그야말로 귀신이라도 본 듯한 얼굴이었다.
“벤? 벤 도련님? 그분이 맞아요? 미안, 데이브. 네 말이 맞았네...”
얼어붙은 세 명의 하그리브스 사이로 클라우스가 팔랑거리며 뛰어왔다. 그레이스와 바냐가 서 있는 곳에서 후원을 향하자 여태 담에 가려져 있던 인영이 드러났다. 정원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는 훤칠하고도 단정한 외형에 보랏빛 도포를 두르고 바냐처럼 어두운 눈동자와 머리색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 맞아. 내가 본 게 저 사람이야.’
“잠깐, 그런데...”
멍하니 벤을 바라보며 데이브의 말을 듣던 클라우스가 문득 그레이스와 바냐를 돌아보았다.
“지금 두 분께도 돌아가신 벤 도련님이 보이시는 겁니까? 허, 도련님 귀신 목격담이 있다더니 음기가 어마어마한 영혼이신가 보군요.”
“아니... 아닙니다. ‘돌아가신 벤 도련님’이 아니에요.”
바냐가 한숨을 토해 내듯 힘겹게 말했고 그레이스는 여전히 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벤은 침을 삼키고 다시 걸음을 옮기며 자신이 상당히 긴장했음을 깨달았다. 그레이스에게 해명할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한 동시에, 바냐와 레지널드 이외의 사람을 제대로 대하는 것이 수년 만에 처음이라 생소한 기분이 들었다. 마침내 후원 밖으로 나온 벤은 우선 어리둥절하고 있는 클라우스에게 인사를 건넸다.
“벤 하그리브스라고 합니다. 보시다시피 살아서, 이 후원에서 지냈습니다.”
“아, 저는 클라우스 카츠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는 것만으로는 생자와 사자를 잘 구분 못해서요. 실례인 줄 압니다만 혹시 옷고름 끝자락만 살짝 건드려 봐도 되겠습니까?”
“자, 보십시오.”
클라우스가 한 발짝 다가가기가 무섭게 바냐가 벤의 손을 덥석 잡아 올렸다. 명백한 생자인 바냐의 손길을 따라 올라가는 벤의 손에 클라우스는 맹한 얼굴이 되었으나 그레이스는 울음을 터뜨렸다. 입을 가리고 흐느끼던 그레이스는 곧 벤을 와락 껴안았다.
“벤. 벤...”
“...죄송합니다, 고모님. 다 설명하겠습니다.”
“저... 저도 들어도 되는 겁니까? 아님 빠질까요?”
소심하게 거수하며 묻는 클라우스에 벤과 바냐는 또 시선을 교환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이스의 등을 토닥이던 벤은 경고로 말문을 열었다.
“조금 반인륜적인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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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히 말하자면 레지널드는 애비게일을 너무 사랑했고 애비게일만을 너무 사랑한 게 문제였다. 애비게일이 죽자 이 세상에는 레지널드가 사랑하는 게 남지 않았고 두 자식인 벤과 바냐도 거기에 포함되었다. 레지널드는 늘 벤과 바냐에게 완벽을 요구했으나 그건 하그리브스의 자제들로서가 아니라 애비게일의 자식들로서 모친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말라는 의미였다.
그러다 괴이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산들바람을 즐기며 정원에서 서책을 읽던 벤의 상반신이 열리고 괴물이 나타났다. 벤은 자신의 힘이 남들을 해칠까 두려워 자발적으로 후원에 머물렀고, 인간미는 없어도 두뇌는 뛰어난 아버지가 해결책을 주리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며칠 후 울면서 찾아온 바냐에게, 레지널드가 바깥에 벤이 죽었다고 알렸음을 전해 들었다. 레지널드에게 괴물 아들이란 애비게일에게 누가 되는 존재였다.
벤의 생존은 그레이스조차 몰랐다. 레지널드가 가끔 후원을 찾았지만 솔직히 벤은 감시받는 느낌이었다. 후원에 갇힌 꼴인 벤에게 유일한 숨통은 바냐뿐이었다. 바냐는 자신보다 벤을 더 열심히 챙겼고 벤은 바냐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동시에 느꼈다. 어째서 그렇게 수년을 참고 살았느냐고 묻는다면, 그보다 더 긴 시간 동안 레지널드의 자식으로 자랐기 때문이라고밖엔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은연중에 아버지의 판단이 옳으리라고 믿으며 감내했다.
하지만 레지널드가 바냐마저 억압하려 들자 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뱃속의 괴물처럼 눈에 보이는 형태는 아니었으나 갑자기 바냐에게도 괴이한 힘이 생겼다는 걸 눈치챈 레지널드는 바냐를 후원으로 데려와 몰아세웠다. 이게 바로 이틀 전의 일이었다. 극한 대치 끝에 벤이 레지널드를 찢었고, 자신이 뒤집어쓸 테니 오라비는 이곳을 떠나 자유를 찾으라는 바냐에게 벤은 고개를 저어 보였다. 바냐를 자기처럼 살게 할 수 없어서 극단적 결정을 한 것인데 당치도 않았다. 그때 인기척이 들려왔고 벤은 바냐를 담 밖으로 급히... 던져 버렸다.
“...수사를 돕는 척하며 남들이 별당 안을 자세히 살피는 걸 막은 겁니다.”
“그저께 밤을 지새우며 바냐와 어떻게 할지를 의논했습니다. 다행히 사람들이 바냐도 의심하지 않았기에... 그냥 며칠 더 기다려서 잠잠해지면 제가 몰래 이 집을 떠나기로 정했지요.”
“그러니까 그 말은...”
벤과 바냐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던 클라우스가 어쩐지 좌절스러운 표정으로 제 얼굴을 감쌌다.
“제가 나대지 않았으면 조용히 있다가 도련님은 곧 자유의 몸이 되셨을 거라는...”
“허나 그랬다면 전 아무것도 몰랐겠지요.”
그레이스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벤과 바냐는 물론이고 클라우스까지 어깨를 움츠렸다. 벤과 바냐가 그간의 사정을 밝히는 동안 이미 몇 차례씩 그레이스에게 사과했으나 그레이스는 말없이 듣기만 했다.
“그리고... 너는 지금도 자유가 될 수 있단다, 벤.”
이번엔 벤과 바냐는 물론 클라우스까지 놀란 눈으로 그레이스를 쳐다보았다. 그레이스는 아주 복잡한 표정이었으나 입꼬리만은 겨우 끌어올리고 있었다.
“하, 하지만, 전 아버지를 죽였습니다.”
“레지널드가 널 먼저 죽였지.”
오라버니가 아닌 레지널드라는 어휘 선택에서 그레이스의 감정이 여실히 드러났다. 벤과 바냐보다 그레이스가 레지널드를 훨씬 오래 알아 온 만큼 그 감정도 여러 가지로 더 깊고 복잡할 것이었다.
“네가 몇 년 전에 그 후원에서 나와 나를 찾았다면 내가 먼저 레지널드를 죽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진담인지 농담인지 모를 소리에도 벤은 고개만 푹 숙였다.
“그랬다면 너희들이 그리 오래 고통받는 일도 없었을 텐데... 믿을 만한 어른이 못 되었던 것 같아 미안하구나.”
“아니, 아니에요!”
“아닙니다, 고모님!”
벤과 바냐는 화들짝 놀라며 그레이스의 말을 부정했다. 실제로 그레이스는 오랜 세월 벤과 바냐에게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 그레이스 또한 그들을 친자식처럼 사랑했다는 걸 벤과 바냐도 느꼈으나 그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레지널드의 벽이 너무 거대했다. 너무 오래 그 벽 속에 있었기에 적어도 레지널드가 죽고 난 다음에는 그레이스를 찾을 수 있었다는 걸 깨닫지도 못했다. 그리고 벤과 바냐에 대한 그레이스의 미안함도 진심이었다. 레지널드라는 벽을 핑계로 어렸던 아이들에게 손을 충분히 뻗어 주지 못했고 그게 작금의 사태를 야기한 듯해 어른으로서 괴롭고 또 미안할 뿐이었다. 세 하그리브스는 곧 얼싸안고 서로의 마음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그때까지 옆에서 멋쩍게 앉아 있던 비-하그리브스는 같은 카츠와 중얼중얼 이야기를 나눴다. 이 가정사의 마무리를 돕기 위한 논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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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땅한 증거도 없이 벤의 죽음을 믿었고 또 레지널드의 죽음을 짐승에 의한 사고로 결론 내렸던 고을답게, 역시 마땅한 증거도 없는 클라우스의 주장을 금방 진실로 받아들였다.
그 주장이란, 벤은 죽은 게 아니라 나쁜 귀신이 데려간 것이었고, 그 악귀가 이번에는 레지널드를 죽였는데, 다행히 악귀가 도망가기 전에 클라우스가 나타나 그것을 무찔렀고(?) 벤을 돌려받았다는(?) 아주 어설픈 이야기였다. 이 황당한 이야기를 퍼뜨리기 전 며칠 동안 클라우스가 고을을 돌아다니며 신이한 능력으로 사람들을 돕고 신뢰를 얻었기에 주장은 기꺼이 용인되었다.(“그런데 귀신을 쫓아내는 건 무당이고 나리는 불러내는 거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어어 가끔 쫓아내기도 한다네 어어어.”)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그만큼 벤을 그리워했기에, 쉽게 믿은 면도 있었다.
신원 회복이 됐음에도 벤은 가문을 떠나고 싶어했고 그건 바냐도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급히 가주라는 이름을 받아들인 것은 어서 수사를 종결하고 장례를 치러서 벤이 도망가도록 상황을 쉽게 정리하기 위함이었지, 바냐는 정말 가주 따위에는 욕망이 추호도 없었다. 바냐가 좋아하는 처자라고 언뜻 밝혔던 시시와 혼인하여 그쪽 집안에서 살고 싶다는 소망을 조심스레 밝히자 그레이스는 더할 나위 없이 기뻐했다. 그렇게 벤도 바냐도 떠날 예정이니 그레이스가 가주가 되는 게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으나, 그레이스는 의미 없는 가문을 해체하고 하그리브스 저택을 학당으로 재탄생시키기로 결단을 내렸다.
바냐에게는 시시, 그레이스에게는 학문이라는 목표가 있었으나 가문을 떠나는 것 자체를 원했던 벤은 그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했다.
“저기, 벤 도련님.”
“...편하게 부르십시오. 혼인은 안 했으나 솔직히 도련님이라고 불릴 나이는 옛날에 지났습니다.”
“에, 그럼... 선생?”
벤은 아예 말을 놓으라는 의미였으나 벤 또한 클라우스를 선생이라 불렀으니 서로 호칭을 같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벤은 딱히 갈 곳을 정하지 않았으니 한양으로 돌아간다는 클라우스와 잠시 동행하는 중이었다.
“혹시... 저와 함께 다니실 의향이 있으십니까?”
“지금 그러고 있잖습니까?”
“아니, 이렇게 잠깐 말고요...”
클라우스는 답지 않게 쑥스러운 듯 몸을 꼬다가 천천히 낯빛을 정리했다. 차분해진 클라우스는 어딘가 아련해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로 땅을 봤다가 하늘을 봤다가 제 손을 들여다보았다.
“선생은 그 힘을 괴물이라고 칭하셨으나, 어쩌면 그 능력으로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 ...아닙니다, 이건...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저도 이걸 오랫동안 저주라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클라우스는 짜잔 하듯 양손을 펼쳐 보였다. 지금은 가볍게 웃는 클라우스에게도 쉽지 않은 과거가 있었음을 벤은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벤이 망설이는 표정을 짓자 클라우스는 아련했던 기색을 싹 지우고 장난스레 말했다.
“그리고 이건 제 사심입니다만, 선생께선 양기가 아-주 가득하십니다! 귀신들이 그 촉수 때문에 도망간 게 아니에요! 귀신들은 그냥 선생을 불편해 합니다!”
“...그게 좋은 겁니까?”
“축복이지요. 허니 선생께서 저와 함께해 주신다면 최소한 저를 늘 돕게 되시는 겁니다.”
“선생의 일은 귀신을 불러야 하는 건데 제가 방해가 되지는 않겠습니까?”
“하! 그건 또 저를 과소평가하신 겁니다. 그냥 보는 거랑 힘을 써서 불러내는 건 다른 일이니까요. 그래서 우리 데이브는 선생이 그리 불편하지 않다고 하고-”
“제가 정말 어떻게든, 이걸로 사람들을 도울 수 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저를 위로하려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벤은 자신의 옷섶에 손을 얹고 진지한 눈빛으로 클라우스를 쳐다보았다. 클라우스는 또 장난기를 싹 지우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대로 중대한 사안이라 멎었던 둘의 걸음이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침묵을 지키며 한참을 더 걷던 벤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 둘이 다니는 건가요.”
“정확히는 셋입니다. 데이브, 정식으로 인사해!”
클라우스는 상대에게 보이지 않는 걸 알면서도 정중히 고개를 숙이는 데이브와 엉뚱한 곳을 바라보고 어정쩡하게 인사를 하는 벤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어쩌면 한양에 가기 전에 다른 곳에 들러 셋의 합이 잘 맞는지 확인해 보는 것도 좋은 생각일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