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인(情人)
- 디젠 @justhargreeves
클라우스 파이브 벤 바냐
" 반아. "
반은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 바람에 자수를 놓던 천을 잘못 삐져나온 바늘에 왼쪽 검지손가락을 찔렸지만, 수 년간 조신한 여자가 되어야만 한다는 별의별 잔소리를 들어온 반이었다. 조신한 여자나 참한 아내나 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임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소견을 입 밖으로 낼 용기는 없었다. 그리고 자신도 어느 정도 체념하고 있던 문제였기에, 그런 반에게는 자신의 고통을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그저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도록 조용히 내뱉은 악, 하는 작은 탄식소리가 다였다.
" 미시에 약속이 있으니 미리 준비해두거라. "
어딘가 나가려는 듯, 은은하고 부드러운 청백색 도포를 두르고 좌우대칭이 완벽한 멋드러진 갓을 쓴 아버지였다. 염탐이라도 하는 눈빛을 지니고는 반의 방문 앞에 서서, 근엄하게 뒷짐을 진 채로 반을 내려다보는 모습은 참으로 양반다웠다. 그는 그의 바람대로 조신히 자수를 수놓고 있는 반의 모습이 마음에 든다는 표시로 흐뭇하게 웃으며 길게 자란 턱수염을 끌어내렸다. 오늘따라 그 교활한 얼굴에서 알 수 없는 혐오감이 치밀어 올랐다.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반을, 바르고 곱게 잘 자라나 준 자신의 딸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권력을 위해 대대로 집안 내력이 좋은 남자에게 어떻게든 시집을 보내려는 아이 쯤으로만 여기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이렇게 갑작스러운 약속이라함은 그의 아버지가 반의 상대를 점찍었다는 뜻이었다. 슬슬 혼기가 찬 양반가의 어느 능력 좋은 분이시겠거니, 반은 자연스레 생각했다. 옆집의 누구가, 앞집의 누구가, 저 멀리 고을 끝자락에 사는 누구가, 누구한테로 시집갔다더라, 누구한테로 장가갔다더라. 익히 들어왔던 소문들과 그리 다를 것도 없었다. 집을 나서려 돌아서는 아버지에게는 고분고분히 알았다는 대답만을 전한 후 아까의 작은 탄식과 같이 약한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바늘에 찔린 손가락에서 장미꽃의 빛깔을 담은 듯한 핏방울이 반의 슬픔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눈물처럼 동그랗게 맺혔다.
*
높은 하늘에 둥둥 떠 있는 구름을 뚫고 반짝이는 햇살이 반의 머리 위를 따뜻하게 비추었다. 반은 그의 아버지가 여종인 명희를 통해 일러준 곳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요즘 바깥세상은 너무 위험하니 기어코 같이 가겠다고 징징대는 명희를 겨우 따돌린 후라 자꾸만 삐져나오는 숨에 힘겹게 쌕쌕거리면서도, 마치 그렇게 한다면 자신을 외부로부터 보호할 수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머리와 몸을 덮은 쓰개치마를 꼭 쥐고 잰걸음을 쳤다. 오랜만의 외출인데, 명희와 같이 나왔다가는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고 또 언제 어떻게 아버지에게 일러바쳐질지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명희가 자신을 따라 나오겠다고 한 것에 대한 더 정확한 까닭은 따로 있었다. 마음에 품은 남자가 있음을, 반은 뻔히 알았다. 아직 얼굴이 어리고 반들반들해서 그렇지, 이제 명희도 어엿한 숫처녀였다. 종의 신분인 명희도 바라는 사람이 생겼는데, 자신은 눈 여겨 본 사람조차 없다는 것에 대해 반은 약간의 씁쓸함을 느꼈다. 그러나 애초에 반은 자신이 아닌 아버지가 정해주는 남자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기에, 미래의 남편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지금조차도 이런저런 딴생각을 하며 길을 걸었다.
약속 장소와 가까운 휘어진 길목에서 방향을 틀려는 찰나, 반은 달려오던 누군가와 부딪혔다. 딴생각을 하는 바람에 주위를 둘러보지 못한 탓이었다. 충격에 뒤로 밀려난 반은 그만 쓰개치마를 놓치고 말았다. 떨어지는 치마 너머로 보이는 사람은 검푸른 도포를 입은 남자였다.
역시 뒤로 밀려난 남자는 비틀거리는 반을 발견하더니 헉 소리를 내며 깜짝 놀란 얼굴로 반에게 조심히 다가갔다.
" 괜찮으십니까? "
쓰개치마를 놓치는 바람에 자신의 얼굴이 외간남자에게 뻔히 보여질 것이라고 생각한 반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지기 시작하자, 남자는 더욱 당황해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술이라도 마신 듯 원래도 살짝 발갛던 얼굴이 반을 따라 더 붉어지기 시작했다.
" ㅈ..죄송하게 되었습니다. "
남자는 바닥에 떨어져 여기저기 흙이 묻어버린 쓰개치마를 감히 주워주지도 못하고 말을 더듬으며 사과했다. 마치 바람에 날린 것처럼 부드럽게 뻗친 머리를 억지로 정리해놓은 듯한 석탄보다 새카만 머리와, 그와 잘 어울리며 밤하늘보다 검은 눈동자가 참으로 인상깊은 남자였다. 꽤나 급이 좋은 듯하며 푸른색이 약간 감도는 검은 도포에, 차분한 말과 표정 그리고 행동, 그 중에서도 특히 다른 남자들과는 다르게 그를 어려워하며 존대하는 남자의 말투에 반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그에게 말을 걸고 말았다.
" 존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늘 저와 만나기로 한 양반가의 자제분이 아니십니까? "
반의 말에, 그의 얼굴에 순간 무언가 알아차렸다는 표정이 스쳤지만 금방 잦아들었다. 남자는 그가 왔던 곳을 슬쩍 쳐다보더니 반에게 대답했다.
" 아..... 아.. 아닙니다. 아, 양반가의 자제..는 맞지요. 그러나... 그럴만한 위인은 못 됩니다. "
그럴만한 위인이라니?
" 낭자께서 찾는 사람은 아마 저 정자에서 낭자를 기다리고 있을겁니다. 저는 신경쓰지 마시고 어서 가보시는 것이... "
남자는 자신이 달려 지나왔던 길목 너머를 가리키며 말을 돌렸다. 마치 얼른 이 자리를 떠나고 싶고 자신이 여기 있음을 알리고 싶지 않다는 태도였다. 그러나 궁금한 것은 도저히 참지 못하는 반의 성격이 튀어나왔다.
" 그것이 무슨 말씀이신가요? 그... 위인이 못 된다니요...? "
남자는 갑작스러운 질문에도 다정함을 잃지 않은 말투로 대답했다. 물론, 그 안에 내포된 당황스러움도 여전했다.
" 양반가의 자제이지만, 양반은 아닙니다. "
" 아... "
그의 차분한 말소리를 듣는 순간 반의 머릿속에 서자라는 단어가 스쳐지나갔다. 양반의 아들이자, 그와 동시에 첩의 아들. 상대보다 나이가 많더라도 고개 숙여야하고, 아버지가 아주 좋은 가문의 양반이더라도 본인은 그렇지 않은. 서자들은 대체로 평민과 비슷한 취급을 받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나쁘지 않은 집안의 나쁘지 않은 도령처럼 보인다고 해도, 그들은 절대 양반으로 살 수 없었다. 반은 그제야 자신과 부딪혔을 때 보였던 그의 행동이 이해가 되었다.
물론 그럴테지. 저 좋은 옷을 입고 얼굴 빛깔도 이리 좋으신 분이 아무 이유 없이 나에게 존대를 할리가...
그러나 신분은 사람을 판단하는 데에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려는 반을 내려다보며, 그가 이미 안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 그리고, 제 자신도 그리 좋은 사람은 아닐거고요. "
다소 슬픈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는 반에게서 시선을 피하려 몸을 살짝 돌리며 그가 말했다. 그 바람에 푸르런 옷자락이 바람결에 스쳐 부스럭거리며 움직였다.
그의 고운 얼굴에 뜨인 표정은 보는 이로 하여금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는 안쓰럽게도 자신이 속한 집안을, 자신이 안고 태어난 운명을, 그리고 자기 자신을 좋아하지 않았다. 반은 그런 그에게 강한 동질감을 느꼈다. 반 역시 돈과 권력만을 노리는 자신의 집안을, 양반으로 태어난 자신의 운명을, 그리고 아무 재능도 없는 자기 자신을 좋아하지 않았다. 반은 약속이 있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그에게 물었다.
" 괴로운 것이 많으신가 보네요. 그런 것들은 마음 속에 담아두지 마세요. 슬픔은 남들과 공유하면 서서히 사라진답니다. 저에게라도 말씀하시겠어요? "
반의 말에 그는 죄책감이 가득 찬 표정을 지으며 씁쓸하게 웃었다. 홍조를 띠던 얼굴이 조금 더 발개졌다.
" 방금도 꽤나 나쁜 짓을 하고 말았습니다. 벌써 몇 년째지요. "
구원의 손길을 찾는 어린 양처럼, 아련한 눈빛으로 하늘을 한 번 쳐다보고는 시선을 내려 말했다. 그러나 반이 그의 말을 잘랐다.
" 무슨 짓을 하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리 슬퍼하지 마세요. 제가 보기에 도령은 아주 선한 분이신 것 같은걸요. "
" 선한 것과 좋은 것은 달라요. 저는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너무나도 많이 저질렀습니다. "
남자의 맑은 눈에 눈물이 반짝거리는 것을 본 반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를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그 눈물 너머로 취기가 도는 것 같은 눈빛을 마주한 반은 그를 따라 촉촉히 눈을 빛냈다. 남의 안타까운 사연을 듣기만 해도 눈물이 고이는 것은 반이 어떻게 제지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날 때부터 그랬다.
" 낭자, 만에 하나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싶을 때는 그냥 포기하세요. "
자신은 포기하지 못했던 것일까. 당신이라도 위험에서 벗어나라는 듯 반에게 충고하는 목소리에는 슬픔이 가득했다. 반은 끝내 알게된지 몇 분 지나지도 않은 남자에게 친근히 묻고야 말았다.
"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
" 이헌..이라 합니다. "
자신의 이름을 물어보는 반의 질문이 의아하다는 듯 하면서도 그 단어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는 듯한 말투로 그가 입을 열었다. 아직도 그의 고운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
반이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미시를 훌쩍 넘어 신시를 향해 가는 시각이었다. 양반의 체면 따위는 굶주린 호랑이에게 끼니로 던져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몹시도 급하게 뛰어갔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상대가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가버린다고 하여도 할 말 없을 정도였다.
약속 장소는 생각보다 정갈하게 꾸며진 수풀 사이에 위치한 고급진 정자였다. 곧게 트인 골목에서 정자까지 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정자가 서 있는 공터 중앙까지는 꽤나 먼 거리였기에 도무지 소리를 내지 않을래도 않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 체면이라도 세우고 싶었는지 흙먼지가 여기저기 묻어 못 쓰게 된 쓰개치마를 기어코 덮어쓰고는 몰래 도난이라도 하러 온 사람처럼 살금살금 걸어 나타난 반의 눈앞에 비친 사람은, 다름 아닌 이혼이었다.
" 그래, 낭자의 이름이... 반이던가? "
그러니까, 왕자.
반의 어깨 높이를 훌쩍 넘는 높다란 정자 위에서 벽에 머리를 대고, 어두운 초록빛이 도는 옷은 제대로 걸치지도 않은채로 거의 눕듯이 나른히 앉아 태연하게 말을 건네는 그였다. 녹색 눈에, 약간 곱슬거리는 머리를 위로 틀어올린, 꽤나 생긴 얼굴에는 항상 알 수 없는 미소를 띄우며 다니던 그였다. 유난히도 흉년이었던 작년 가을에 백성들을 살피겠다고 직접 행차한 것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목격했던 기억이 금세 떠올랐다. 그 때보다는 외모가 조금 떨어진 것 같았지만, 반은 그 사실을 크게 느끼지 않았다. 아니, 느낄 수 없었다. 눈 앞에서 왕의 아들이 내게 말을 거는데 달리 무슨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그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놀라움과 순간적으로 느낀 두려움에, 이내 눈이 휘둥그레져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연신 고개를 숙이는 반의 머리 위로 그의 가벼우면서도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아니, 아니. 그러지 않아도 된다. "
" 소...송구하옵니다...! 죽을 죄를... "
" 죽을 죄는 무슨 죽을 죄~... 난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얘기하는 것이 싫다. 죽는다는 건... 그리 가벼운 게 아니란 말이야... "
그는 은은하게 퍼지는 약한 향기에 취하기라도 한 것처럼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작게 투덜댔다. 어딜 보아도 왕자다운 면모는 없었다.
그리고 그 자신도 그 사실을 알고 즐기는 듯 했다.
" 아무튼간에, 반이 맞는게로구나? "
방금 전과는 사뭇 다른 표정으로 반을 내려다보며 활짝 웃는 그의 얼굴을, 반은 감히 똑바로 쳐다보고야 말았다. 왕자의 얼굴을, 그것도 바로 앞에서 똑바로 쳐다보다니! 항상 그 죽일 놈의 호기심이 문제였다.
" 맞사옵니다, 저하. "
" 됐다, 됐어! 그런 호칭 같은 건 다 필요없으니 집어치우고 그냥 편히 대하거라. 뭐... 이미 알고야 있겠지만, 내 이름은 혼이다, 이혼. "
정말 집어치우라는 듯이 손을 내어 휘젓고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아버지에게 익히 들어 이미 아는 사실이었다. 빛날 혼 자를 써서 이혼이라 하였다.
" 보아하니 너는 내가 나올지 몰랐나보구나? "
알았다면 이러지 않았겠지요, 반은 아직도 고개를 푹 숙인채로 생각했다. 왕자, 왕자라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왕자라니!!
" 그러하옵니다. "
속으로는 연신 소리소리를 질러댔지만 정작 입으로 새어나오는 것들은 자잘한 웅얼거림이 전부였다. 그러니 반의 바쁘디 바쁜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들어찰지 혼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자신에게 편하게 대하는 것에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어투로 혼이 중얼거렸다.
" 편히 대해도 된대도... 어차피 다른 이들은 날 왕자로 보지도 않으니 정말 괜찮다. 두 말 하지 않을터이니 내 이름을 편히 불러다오. "
반이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를 곁눈질하기만 하자 혼이 다그쳤다.
" 어서. "
" 혼...아. "
반은 떨어지지 않는 두 입술을 겨우 움직여 그의 이름을 불렀다. 다시 돌이켜보면, 역사에 길이 남을 대담한 답이었다.
왕자의 이름을 부르다니. 그것도 본인 앞에서!
" 그렇지! 그래, 그리 쉬운 걸 이제서야 하다니. 뜸만 들이다 목 빠질 뻔 했다. "
그러나 혼은 내심 좋다는 태도였다. 반을 향해 활짝 웃으며 손뼉을 치고는, 마치 달디 단 엿을 한 관 선물받은 어린 아이처럼 좋아라하는 그의 모습에 반은 알 수 없는 동정심을 느꼈다. 자신의 처지를 이리도 부정하고 싶어하다니.
" 그렇게나 좋으...니? "
작게 웃으며 묻는 반에게 혼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 친구가 생긴 것 같아 좋구나. "
그러더니 아차, 하는 표정을 짓고서는 물었다.
" 친구...라고 불러도 괜찮겠지? "
친구라고 불러서 안 될 일이 무엇이 있겠냐고 말하려는 찰나, 이 자리는 훗날 맺게 될지도 모르는 혼인을 위한 자리라는 것이 불현듯 떠올랐다. 아침부터 너무 많은 일이 있었지만 그것 조차도 바로 기억해내지 못하고 이 자리에 앉아있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 말하자면... 반아, 나는 너를 만나 부부의 연을 맺으러 여기 온 것이 아니다. 내가 오래 전 부터 마음에 둔 이가 있는데... "
그러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바닥을 내려다보며 입을 옴짝달싹 못하는 혼이었다. 어차피 자신도 상대가 정해진 혼인에 큰 관심은 없었기에 괜찮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러나 몇 초가 지나도 말을 않는 혼의 모습에, 도대체 그 이가 누구이길래 이리도 뜸을 들이나 생각한 반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
" 누구...? "
" 그 이가 이 근처에 살아서 방금도 그를 만났단다. "
분명 몇 분, 혹은 몇 시간 지나지 않은 일일 텐데도 원치않게 보내버린 먼 과거를 회상하는 것 같은 눈빛과 말투였다. 반이 안타까운 심정으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는 찰나, 혼의 어깨너머로 다른 남자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 이혼!!! "
혼은 그 말에 놀란 듯 튀어오르더니 눈을 꾹 감고선 뭐라고 중얼거렸다. 자유, 괴팍한, 영감... 단어 단위로 몇 마디가 들려왔지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반에게 더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 듯 보였지만 마음을 접은 듯 한숨을 내쉬더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 미안하게 되었구나. 성격 급한 내 형제가 나를 찾아온 듯 한데... 괜찮다면 다음 번에 다른 약속을 잡자. 시간도 늦었고... "
" 그럼, 당연하지. "
머뭇거리는 그의 모습에 반이 괜찮다며 말했다.
그런데... 형제라고?
" 형제라고? "
또 멋대로 입을 놀렸다. 아차 싶은 마음에 얼른 손으로 입을 가렸지만 이미 튀어나온 말을 주워담을 방법은 없었다.
" 무슨 문제라도. "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나 끔찍하게도, 많이 웃었음을 보여주는 혼의 친근한 입가는 움직이지 않았다. 반의 어리석음에 대한 대답은 혼이 아니라 그의 뒤에서 들려왔다. 반은 눈을 질끈 감았다. 형제라고 하였으니 한 명밖에 없었다. 틀림없이 악명 높은 둘째 왕자, 이오일 것이었다.
갑자기 들려온 그의 목소리에 혼이 가슴을 움켜잡고 놀란 듯 물러서자 비로소 그의 모습이 보였다. 상대를 꿰뚫어보는 듯한 날렵한 눈에, 하늘을 찌를 듯 오똑한 코, 굳게 닫혔지만 언제든 독설을 쏘아붙일 영특한 입술. 미간은 짜증이 난 듯 약간 찌푸려져 있었는데, 그럼에도 그의 얼굴은 빛났다. 입고 있는 옷은 바다를 한데 모아 놓은 듯한 푸르런 비단 재질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어두운 바다. 반은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제발 내 뒤에서 소리도 없이 나타나지 좀 말라는 혼의 호들갑스러운 비명소리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순간이동이 네 특기냐고 묻는 혼을 힐끗 쳐다보며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오의 얼굴만이 느껴졌다.
그가 혼에게서 시선을 떼고는 반을 쳐다보자 두 눈이 마주쳤다. 익숙하게 아름다운 녹색 눈이었지만, 이전과는 달랐다. 그의 눈은 보석과 같은 녹색 눈이었다. 보석과 같은, 녹색 눈. 그러나 그 눈은 이내 반에게서 시선을 떼어 다른 녹색 눈의 주인에게로 옮겨갔고, 그 덕분에 반은 한 번 더 숨을 들이킬 수 있었다. 정말 보석과도 같은 녹색 눈이었다. 부드러운 옷 밑으로 자신의 심장이 세차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어쩌면 얼굴도 빨개졌을지도 몰랐다.
" 약속을 방해해서 미안하군. "
오가 사무적인 말을 건넸다.
" 아~ 괜찮다. 우린 그런 사이가 아니야. 그저 새 친구를 사귄 것 뿐이니. "
반은 혼의 말에 오의 진한 눈썹이 살짝 뒤틀리는 것을 보았다. 불만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만족감에 의한 것인가.
표정이 워낙에 굳어있던지라, 반은 그의 감정을 알 수 없었다. 어릴 때부터 남의 기분을 잘 눈치채곤 했던 반이었지만 그의 굳은 얼굴에서는 감정을 읽어낼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을 알고 있고 그 모든 것들이 그리 달갑지는 않다는 듯한 그의 표정과 태도는, 그의 나이가 어림에도 불구하고 한 평생을 살고 겨우겨우 돌아온 어느 나이 지긋한 노인의 것 같았다.
" 신필 선생이 부르신다. 한 나라의 왕자 되는 놈이 또 어딜 싸돌아 다니냐고. "
" 아~ 그 자식은 왜 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래? "
아무 말도 않고 자신을 바라보는 오에게, 혼은 투덜거렸다. 발음이 약간 꼬였다. 아무래도, 약간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 차라리 헌을 내 자리에 앉혀라. 나보다는 그 편이 낫지 않냐? "
또 술을 처마셨군, 오가 들릴 듯 말 듯 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비웃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위협적이게 읊조렸다.
" 네 삶을? 죽이게 좋아하겠네. 헛소리 그만하고 조용히 따라와. "
" 헌...? "
의도하지 않게 오의 대답을 들은 후로 줄곧 가만히 있던 반이 입을 열었다. 아는 이름이었다.
" 음? 그래, 이헌. 헌을 아나? "
반을 향해 돌아보며 혼이 물었다. 처음 만났을 때 그가 취했던 자세와 같은 나른한 말투였다.
" 안다고 할 수 있지....요. "
혼의 어깨너머로 오의 시선이 느껴졌기에, 반은 얼른 존칭을 덧붙였다. 또 잘못 물었나, 싶었다. 처음 등장부터 지금까지도 참으로 신경 쓰이는 남자였다. 여러 의미에서.
" 헌을 안다고? 그건 좀 의외로구나. "
자초지종을 묻듯, 반에게로 아주 살짝 몸을 숙인 혼이 반의 긴장 가득한 표정을 살피더니 오를 쳐다보며 말했다.
" 너 때문에 애가 겁 먹었잖냐~ 표정 좀 풀어라, 이 영감아. "
" ...미안하군. "
오는 잠시 동안 아무 말 없이 반을 빤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러자 그 녹색 눈을 또다시 마주하게 되었는데, 반은 이상하게도 자신의 모든 생각이 읽히는 기분이 들어 얼른 시선을 내렸다.
" 이만... 가보겠습니다. "
반은 어깨에 내리고 있던 쓰개치마를 위로 끌어올리며 정중히 머리를 숙이고는 뒤를 돌아버렸다. 피곤했다. 아침부터 너무 많은 일이 있었고, 놀랍게도 두 왕자 앞에 선 지금 또한 일이 벌어지는 중이었다. 이제는 지긋지긋한 집으로라도 돌아가고 싶어 깊이 생각하지 않고 성급하게 뒤를 돈 것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습득한 예절에 따르면 절대 그래서는 안 되었지만, 그 순간 반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것도 신경쓰이지 않았다.
" 낭자. "
자신을 부르는 애처로움이 담긴 목소리의 주인공을 제외하고는. 등 뒤에서 오의 목소리가 들리자 반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 혹시 자네 아버지가... 영의정 되시지 않던가? "
조금의 표정 변화, 그리고 조금의 행동 변화 없이 묻는 그에게 반은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움켜쥔 쓰개치마로 붉어졌을 얼굴을 감추려 애썼지만 그럴 수록 흘러내리는 것만 같았다.
" 알았다. 호위병을 붙여줄테니 이만 가도 좋다. "
그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정자 밑으로 손을 내어 휘저었다. 그 손짓에 밑에 있던 호위병이 혼과 오에게 허리 굽혀 인사하더니 정자 위로 올라와 반에게로 다가왔다. 아직도 얼굴을 붉히며 호위병을 따라 가려는 반에게 미련이라도 남는지, 오가 한 눈을 판 사이에 숨겨 둔 빈 술병을 몰래 챙긴 혼이 얼른 자리를 뜬 이후에도 오는 곧바로 떠나지는 못했으나 반이 뒤를 돈 후에야 자신도 뒤를 돌았다.
높은 하늘에 둥둥 떠 있는 구름을 뚫고 반짝이는 햇살은 여전히 눈부셨고, 한 이름 난 양반가의 외동딸은 오늘만 해도 왕의 아들 둘, 그리고 서자 한 명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이 사단이 시작된 것이었다.
*
" 거기서 또 뭐했어? "
궐 안으로 들어가는 혼의 옆에서 오가 날카롭게 물었다. 그들의 뒤로 궁궐의 거대한 문이 쿠웅, 하는 육중한 소리를 내며 서서히 닫혔다.
" 알면서~... "
혼이 춤을 추듯 양쪽 팔과 고개를 이리저리로 저으며 대답하자 지나가던 나인들이 그들을 몰래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오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그쪽을 노려보자 겁먹은 몇몇이 흠칫 놀라며 얼른 하던 일을 마저하는 척 했다. 다시 혼에게로 고개를 돌리고 이를 뿌드득 갈며 궐 안으로 발을 내딛은 오는 그들의 양쪽에서 허리를 굽히는 병사들이 듣지 못하게 소리를 죽이고는 낮게 읊조렸다.
" 헌 근처에 가지도 마. "
" 워, 워, 그건 내가 할 말인데 말이다. 당신이야말로 헌 근처에 얼쩡거리지 않았나? "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혼이 투덜거렸다. 그러자 오가 정말 끔찍이도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가지 말라면 가지 마. "
" 지금 남의 연애를 보기 싫어서 그러는 것이냐? "
" 지금 한 사람을 살리려고 그러는 것이다, 멍청아! "
오는 끝내 참지 못하고 멈춰서서 소리를 질렀다. 참다참다 폭발해버린 것이었다. 원래부터 그렇게 불같이 까다로운 성격에 남들이 쉬이 다가서지도 못했던 참으로 특별한 인품이었지만, 이번에는 흥분의 전도가 여느 때보다도 빨랐다. 타오를 듯 번뜩이는 녹안에 긴장으로 딱딱히 굳어버린 턱, 금방이라도 누군가에게 뻗을 것처럼 꽉 쥔 주먹까지 몸의 모든 신경 하나하나가 곤두서서 도저히 맨정신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기분 좋다고 춤을 추며 앞으로 가던 혼은 그 말을 듣고는 단단한 벽에 부딪힌 것처럼 딱 멈춰섰다.
" 살린다고? "
혼이 그게 무슨 헛소리냐는 듯이 얼굴을 찌푸리며 뒤를 돌아 오에게 물었다.
"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쳐듣지? 그래, 살린다고 하였다. "
조금은 진정된 것 같았지만 여전히 활활 타오르는 상태로 오가 날카롭게 대답했다.
" 살릴 게... 뭐가 있지? "
충격적인 표정으로 무언가 생각하는 듯 이리저리로 눈을 두며 시선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자 오가 쏘아붙였다.
" 생각을 좀 해 봐라, 그 잘난 머리는 정말 술 들어가는 데에만 쓰이는건가? "
혼의 어리둥절한 표정만 봐서는 오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그는 대대적으로 유명한 주정뱅이였으니 그럴 법도 했다. 저 새끼가 정말 제정신이 아닌가, 싶은 마음에 오는 확인이라도 하듯 물었다.
" 넌 세자야, 알아? "
" 그래, 알다마다... "
혼은 또다시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오를 쳐다보았다.
" ...근데 넌 나한테 반말이나 쓰고 있잖냐. "
" 젠장, 이혼!!! "
" 알았어, 알았어! 그래서... 누구를 살린다고? "
" 잔뜩 취한 네 빌어먹을 대가리로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내가 바보지. 헌 말이야, 이헌! "
" 헌? "
그 한 단어에 그제야 오의 말이 제대로 들리기 시작했는지 꽤나 아름다운 혼의 눈이 갑자기 커졌다.
" 그래, 이헌! 혼기가 다 찬 한 나라의 왕자라는 자식이 간택도 거부하고 위에서 내려준 상대들과는 제대로 만나지도 않으면서 그 시간에 웬 남자랑 눈이 맞아 대낮에도 술 처먹고 싸돌아다니는데, 고위 관리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느냐? 헌을 가만히 둘 것 같느냐고. "
" 너... 너... "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는 표정으로 오를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오가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 그러니까 헌 근처에 가지도 마라. 난 말했어. "
" ...좋아하는거야? "
그러나 오의 말은 또다시 귀에 들어오지 않는 듯, 오가 자신의 말을 끊고 내뱉은 그 위협적인 두 문장은 싸그리 무시한 채 혼이 말을 이었다. 그 말에 오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확 굳어지며 험한 말을 마구 쏘아대던 그 입이 조용히 다물어졌다. 혼의 시선을 피하는 것으로 보아 자신에게 주어진 의문에 대한 대답을 회피하는 태도였다. 남에게는 서슴없이 이빨을 드러내지만 주인에게만큼은 고분고분한, 마치 조련당한 맹수 같은 모습으로.
" ...멍청이같이 어디 가서 이 얘기 꺼내기만 해봐, 네가 살해당하기 전에 내가 먼저 죽여버릴거니까. "
오는 끝까지 혼의 물음에 대답을 하지 않은채로 뒤돌아 섰다. 급한 감이 없지 않아 있는 것 같았다.
" 알아 처먹었으면 신필 선생한테나 가봐, 또 술기운에 질질 짜지 말고. "
자신의 넓직한 어깨 너머로, 오가 쏘아붙였다. 그러나 혼은 아직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멀어져가는 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
" 헌아. "
단단한 대문을 천천히 닫던 헌은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멈칫했다. 아직 밝기는 했지만 저 멀리 보이는 붉은 해가 푸른 산을 넘어 뉘엿뉘엿 지려 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늦게 집에 돌아온 것이었다. 헌은 조용히 욕을 뱉었다. 아무래도 몰래 들어가려는 계획은 실패한 듯 했다.
" 예, 대감님. "
문을 닫은 속도만큼 천천히, 몸을 돌려 그의 아버지를 마주했다.
" 또 어딜 나갔다가 오는 것이냐? "
헌이 그에게로 정중히 고개를 숙이자 청백색 옷을 입고 선 그가 근엄하게 뒷짐을 진 채로 헌에게 물었다. 분명히 아버지와 아들 관계임에도 흡사 노비와 주인 같은 모습이었다.
" 저... "
오늘따라 하늘이 맑고 햇살이 밝아 잠깐 바깥에 나간 것이라는, 꽤나 그럴듯한 변명을 하려는 찰나 아버지의 뒤에서 아버지와 비슷한 빛깔의 밝은 청색 옷을 입은 다른 남자가 불쑥 나타나 헌의 말을 끊었다.
" 보나마나 또 남자 만나고 오는 길이겠지요. "
헌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저토록 교활한 목소리는 이 집안에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이신. 그의 아버지의 아들이었다. 그러니까 그의 배다른 형제.
" 친구를 만나고 오는 길입니다. "
헌은 신에게 차분히 대답했다. 헌이 자신에게 말대꾸를 했다는 사실에 신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신의 어머니는 양반이었다. 그러나 헌의 어머니는 첩이었다. 천한 첩의 자식은 정실부인의 아들에게 감히 입도 뻥끗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예절이 신의 거만한 성격을 키워주었다. 몇 년 전 자신의 어머니가 죽었을 때 밤마당에서 울고있던 어린 헌에게 넌 애초에 계획에도 없었던 인간이라고, 신이 잔인하게 내뱉던 것이 다시 헌의 머릿속을 채웠다.
" 친구는 무슨... "
신은 헌의 발 앞으로 침을 뱉었다. 남자는 남자와 벗 이상으로 어울려서는 안 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참으로 치욕적이었다. 헌은 조용히 고개를 들어 신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감히 노려보지는 못하고 눈썹만 세운채로 눈을 반짝일 뿐이었다. 나를 바라보는 저 눈빛은 항상 남을 멸시하는 그의 태도가 어려있었다. 끔찍했다.
" 얼굴이 발개진 것을 보니 대낮부터 청주 한 잔 들이키고 온 것이 아니더냐? "
헌의 얼굴을 본 신이 차갑게 비웃으며 그 못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투였다.
네가 그걸 어떻게.
" 대감님, 그게... "
몹시 당황한 헌은 말을 더듬으며 아버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 됐다. "
대감은 헌은 내려다보며 지친다는 표정을 짓고 말했다. 내 자식이 이 모양이라니, 하는 표정이었다. 아무리 서자였어도 그에게 기대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착각일까?
아버지가 고개를 저으며 뒤를 돌고, 신이 코웃음을 치고는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자 차가운 마당에는 헌 혼자 외로이 남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자신이 참으로 미웠다.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말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
아무리 생각해도 천재지변이 일어날 일이었다.
이혼에게 말을 놓았고 이오에게 말을 걸렸다. 이혼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고 이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반은 따뜻하게 불을 지핀 자신의 방 바닥에 앉아있었다.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들어찼다. 벌써 몇 분째 이러는 중이었다. 멍하니 벽을 쳐다보는 반의 앞에는 놓다 만 자수가 얌전히 놓여있었고 옆에는 흙이 묻어 더러운 쓰개치마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오늘 만난 상대가 왕이 아니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정말 목이 날아갔을거라고 생각하며 반은 자신의 목을 쓰다듬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도 그곳에 있었다.
불현듯 오의 생각이 났다. 보석과 같은 아름다운 녹색 눈. 그 눈 생각이 났다. 본 사람도, 그리고 표현력이 꽤나 풍부한 반으로서도 정말 그 말밖에는 달리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그 눈. 바라보고 있으면 금방이라도 빨려들어갈 것만 같은 차분하고 아름다운 깊은 눈이었다. 눈에 정신이 팔려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검댕처럼 진한 눈썹에 뱉는 말만큼 날카로운 턱, 적당히 튀어나온 이마와 광대까지. 얼굴도 잘생겼던 것으로 기억했다. 물론, 오의 더러운 성깔은 익히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만나보니 생각보다 좋은 사람인 것 같았다. 고작 몇 분이 전부였지만 남의 눈을 바라보는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었다. 이런 재능 또한 날때부터 그랬다. 남의 기분을 쉽게 눈치채는 것처럼.
생각이 자신의 재능까지 미치자마자 반은 눈을 깜빡이며 공상에서 깨어났다. 자신에게 재능 같은 것은 없었다. 주변에서 수군대며 들려오는 소리에 치를 떨던 반이었다. 누구는 한 번만 알려주어도 그렇게 잘 배운다더라. 누구는 윗사람 말을 그렇게 잘 듣는다더라. 누구는 자수를 그렇게 잘 논다더라. 자신도 무엇이라도 잘 해보고 싶었으나 다 허황된 꿈일 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특출나게 잘 하는 것이 하나쯤은 있었다. 그러나 자신은, 배움이든 태도든 손재주든 잘 하려고 해봤자 평균보다 조금 잘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제야 눈 앞의 자수와 옆으로 팽개쳐둔 쓰개치마가 눈에 들어왔다. 답답하고 긴장되는 마음에 조용히 한숨을 쉬고는 치마를 조심히 들어올려 명희가 있을 처소로 발을 옮겼다. 마음을 진정시킬 따뜻한 차라도 부탁하려는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