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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조도(花鳥圖)

​- 모짜렐라 @Dontsleeprella

​클라우스 벤 클라우스

너희 화조도라고 알고 있니?

 

 

 

 

 

꽃가지에 앉아 부리를 서로 비벼 대는 암수 한 쌍의 새.

 

 

 

꽃과 새가 지닌 아름다운 모습과 예쁜 빛깔이 은연중에 시심을 불러일으켜 결혼한 부부에게 많이들 선물한대.

 

 

 

 

얘기만 들어도 행복한 느낌이 물씬 풍기지?

 

 

 

 

 

그런데 오늘 내가 말해줄 이야기는 조금 달라.

 

 

 

 

 

외로이 홀로 가을에 피는 국화꽃

 

 

 

 

 

그 위에 앉아있는 두 마리의 새.

 

 

 

 

 

이 안타까운 두 새의 이야기를 해줄게.

 

 

 

 

 

 

 

 

 

 

 

벤은 꽤나 높은 신분의 집안 자제였어. 위로 형 둘에 누나 하나가 있었지만 그다지 우애가 좋은 편은 아니었지. 우애를 다질 기회가 없었다고 하는 게 맞으려나. 형들은 집안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과거시험에만 얽매였고 누나는 워낙에 명석했던 터라 시집이 아닌 일찍이 자신의 길을 찾아 떠났거든. 그에 반해 어려서부터 병약했던 벤은 집의 뒤쪽 끝 방에서만 지냈어. 항상 푸른색 도포를 입은 채로 책만 읽을 뿐이었지. 밖에도 잘 안 나가고 작은 생채기 하나없이 곱고 뽀얀 피부가 처연하기 그지없었달까. 오죽했으면 시종들이 새하얀 게 마치 죽은사람 같다 해서 국화꽃이라고 불렀겠어?

그런 벤의 반복되는 지루한 삶에 유일한 낙은 뒤뜰에 앉아 책을 보는 거였어. 본인도 몸이 약한걸 알고 있었기에 굳이 밖에 나가거나 하진 않았지. 정말 가끔가다 집 앞에 장이 서는 날 책을 사러 가는 정도? 지독한 독서광이라니까.

 

 

 

 

 

 

 

 

무언의 꿈이 없었던 벤에게는 하루하루가 잔잔한 연못가 같았어. 땅이 흔들리면 벤도 흔들리는 거고 비가 오면 벤도 그 비를 맞는 거고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사는 삶이었지. 듣기만 해도 지루하지?

그런데 말이야 아무리 산속 깊은 곳에 있는 연못가라도 언젠가는 사람의 손을 타게 되어 있어. 누군가는 그 연못가에 돌을 던질 거고 단 한 번도 넘치지 않았던 연못의 물은 이리저리 사방으로 튀게 되겠지.

잔잔했던 벤의 연못가에도 누군가가 다가오는 발걸음이 들리는 것 같아. 누굴까?

 

 

 

 

 

 

 

벤의 집은 뒤뜰이 산이랑 연결되어있어. 담장 바로 뒤가 산이야. 산짐승이 내려오거나 그러진 않는데 가끔가다 한양으로 올라오는 떠돌이 상인들이 자주 지나치곤하지.

그렇게 사람 구경하는 거야 벤은. 저 상인이 짊어지고 가는 보자기에는 뭐가 있을까? 도자기가 있을까, 책들이 있을까, 아니면 장식품들이 있을까 우리 집 앞에 장이 선다면 올까?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다시 책을 읽곤했어.

 

 

 

여느 때와 다름없는 날이었어. 바람이 선선하게 부니 날씨도 좋겠다 뒤뜰에 있는 감나무를 그늘삼아 책을 읽고 있었지. 곧있으면 근처에서 큰 장이 열려 상인들이 자주 보이는 시기여서 그런가 한 사람, 두 사람 힘겹게 지게를 이고 고개를 넘어가는 데 여간 부러운 게 아니더라. 만약에 자신의 몸이 약하지 않았다면 상인이 되었을 거라고 확신하면서 다시 책에 눈을 돌렸지. 해가 서서히 질 무렵 방으로 들어가려고 일어날 즈음이었어. 곱슬머리에 멀대같이 큰 키를 가진 사내가 산을 내려오는거 있지. 그 순간 바람이 살랑 불면서 삐져나온 머리카락이 벤의 이마를 간지럽혔고 동시에 심장이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어. 알게모르게 홀린 듯 계속해서 벤의 시선은 그 사내를 따라갔어. 벤의 집 담장에 가까워졌을 때 사내는 벤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슬쩍 올리더라. 당연히 눈이 마주쳤지. 들키면 큰일이라도 나는 듯 벤은 홱 하고 고개를 돌렸어. 간질거리던 심장은 금세 쿵쿵거리며 소리까지 났어. 이런 벤의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사내가 벤에게 말을 거는데.. 

 

 

 

 

"여기 사시는 도련님이신가 보네요"

"..."

"잠깐 이리로 오실 수 있으십니까?"

 

 

 

 

자기에게로 오라는 말에 살짝의 경계심이 들긴했지만 궁금함을 참을 수 없었던 벤은 쭈뼛쭈뼛 발걸음을 옮겼지. 가까이서 마주한 사내는 멀리서 본 것보다 키나 덩치가 더 컸어. 또 나뭇잎 같은 녹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지. 멍하게 입을 벌린 채로 사내를 바라보자 굵고 긴 손가락을 움직여 입을 다시 닫아주며 예쁘게 웃었어. 

 

 

 

"도련님, 이름이 뭡니까?"

"그건 왜 물어보느냐"

"그냥... 궁금해서?"

"..벤"

"벤! 저는 클라우스라고 합니다. 요근처에 장시가 크게 열려서 물건팔러온 상인이지요."

 

 

 

처음 본 사람이 맞는지 클라우스라는 사내는 주저리주저리 자신의 얘기를 잔뜩 얘기하더라. 먼 곳에서 왔고 부모님은 두 분 다 돌아가셨고 어쩌다 한 상인이 자신을 거둬키워서 자연스럽게 상인이됐다나 뭐라나.. 믿기지 않을법도한 상황인데 벤은 자기도 모르게 빠져서 듣고 있었어. 글로만 보던 이야기들이 누군가의 입에서 나오는 게 꽤나 흥미로웠던 건지 어느새 그래서? 정말? 과 같은 맞장구까지 치더라니까. 초롱초롱하게 바라보는 벤이 마치 작은 병아리같아 클라우스는 하던 얘기를 멈추고 다시 한번 아까의 예쁜 웃음을 지어 보였어. 정신없이 클라우스를 바라보던 벤은 또다시 두근거리는 심장에 고개를 푹 숙여버렸지. 어느새 해가 지고 하늘은 어둑어둑해졌어. 클라우스는 담장에 올린 손 하나를 뻗어 조심스럽게 벤의 코를 살짝 꼬집으며 말했지.

 

 

 

 

"내일 또 오겠습니다 도련님, 좋은 꿈 꾸시길"

 

 

 

 

 

 

 

벤의 연못에 돌이 던져지는 순간이었어.

 

 

 

 

 

 

 

 

 

 

그날 이후 매일 매일 약속이라도 한듯 클라우스와 벤은 담장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꽃을 피웠지. 그저 작은 뒤뜰이었던 공간에는 파도가 치는 바다, 향기로운 꽃들이 가득한 들판, 무르익은 벼들이 고개를 숙이는 논밭이 생기기 시작했어. 클라우스가 보고 듣고 느꼈던걸 벤에게 전부 얘기해줬거든. 벤의 작은 세상이 클라우스로 인해 조금씩 넓어져 가고 있었어.

 

어느 날은 해가 졌는데도 불구하고 클라우스가 오질않더래. 걱정이 된 벤은 찬바람이 부는 밖에서 도포하나 걸친 채로 클라우스가 올 때까지 무작정 기다렸어. 저녁도 거르고 기다리는데 담장위로 낯익은 얼굴이 쏙하고 올라와 봤더니 클라우스야.

 

 

 

"너무 늦었죠? 오늘 일이 너무 많았습니다"

 

"걱정... 했지않느냐"

 

"제가 뭐라고 걱정까지 합니까, 농담도 참"

 

 

 

 

 

 

벤이 귀엽다는 듯이 예쁘게 눈꼬리를 접어 웃는 클라우스였어. 그러다 갑자기 급하게 함께 갈 곳이 있다며 담장너머로 손을 뻗더니 벤을 잡아 끌어당기더라. 안된다며 잡힌 손을 빼려했지만 마음은 그렇지않았던 벤은 힘없이 끌려가 벽에 나 있는 구멍에 발을 올려 담장을 넘었어. 움직임이 서툰 벤이 발을 헛디디어 넘어질 뻔하여지자 클라우스는 벤의 허리를 가볍게 잡더니 조심스럽게 내려놓았어. 놀란 가슴 진정시키고 고개를 드니 한뼘도 안되는 거리에 클라우스의 얼굴이 보였지.

 

 

 

 

"어.. 그..고맙구나"

 

"조심하십시오 그러다 다치시면 저 큰일 납니다"

 

 

 

 

 

 

 

후끈해진 얼굴을 들키고 싶지 않아 재빨리 고개를 돌리는 벤이었어. 알 수 없는 감정에 당황할 틈도 없이 클라우스가 벤을 잡아 이끌었지. 한참을 걸었을까 숨이가빠 헉헉거리던 벤이 고개를 들었을 때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어. 여러 개의 등불들이 떠올라 연못가에 비치는데 숨이가쁜것도 까먹고 멍하니 쳐다볼 정도였지. 그러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클라우스는 더 아름답기 그지없었어. 녹색빛을 띄던 눈동자가 반짝이는데 숨 막히게 심장이 두근거렸거든. 

모든 게 천천히 움직였어.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와 동의를 구하는 클라우스의 눈빛,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뜨며 허락을 말하는 벤의 행동, 그리고 살며시 닿아버린 둘의 입술까지 등불을 배경삼아 빛나던 둘의 첫 입맞춤은 아주 짧은 시간안에 일어났지만 그 둘에게만큼은 잊을 수 없는 긴 시간이었을 거야.

 

 

 

 

 

돌아가는 길,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얼굴만 붉어진 채 앞만 보고 걸었지. 벤은 복잡해졌어. 이게 무슨 감정인지를 알지 못했으니 말이야. 사람을 자주 만나지 못했던 벤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몰랐던 거야. 그저 가슴이 마구뛰고 가만히 있어도 생각나고 보고있어도 보고 싶은 알 수 없는 이 감정이 궁금할 뿐이었어. 

 

오랜 침묵 끝에 다짐에 찬 눈빛으로 클라우스가 먼저 입을 열었지.

 

 

 

 

"며칠 뒤면 저는 여기에 없을 겁니다 도련님"

 

 

 

청천벽력같은 소리였어. 

 

 

 

"그게 무슨.."

 

"이곳을 떠날 거라는 말이에요. 저는 도련님처럼 한 곳에서만 머무를 수 없으니까요"

 

"..가면 언제 돌아오느냐?"

 

"모릅니다. 평생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렇구나"

 

"그래서 말입니다, 저랑 함께 떠나지 않겠습니까?"

 

"제가 도련님에게 자유를 선물해드릴게요."

 

 

 

 

 

벤에게는 달콤한 유혹이었지. 클라우스와 함께라면 모든 할 수 있을 것 같기도했고, 무엇보다도 이 지긋지긋한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본래 겁이 많았던 벤이었고, 클라우스에 대한 마음이 어떤 것인지 확실하지 않은 상태였기에 확답하지 못했어. 누군가 그 감정이 사랑이라고 알려주었다면 좋았을텐데말이야.

 

 

 

 

 

"미안하다.. 미안해.. 내가 겁이 많아서 미안하구나.."

 

"괜찮습니다.. 울지마십시오"

 

 

 

울지말라고했으면서 자기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보이는 클라우스였어. 벤은 가슴 한쪽이 아려오기 시작했지. 이해할 수가 없었어. 병에 걸린 것도 아닌 게 클라우스만 보면 행복하면서도 슬프고 가슴이 뛰면서도 찢어질듯이 아프곤했거든. 내일 곧바로 떠난다는 클라우스에 벤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 애꿎은 돌만 발로 차며 알 수 없는 이 감정을 꾸욱 누른 채 그저 묵묵히 뒤를 따라 걸을 뿐이었지. 집에 다다랐을 때쯤 클라우스는 고개를 푹 숙이고 말했어.

 

 

 

 

 

"도련님 혹시 전에 제가 했던 말 기억나십니까?"

 

"무슨..?"

 

"어떤 사람은 죽을 때까지 사랑을 모른다는 말"

 

"아.. 기억나는구나"

 

"그리울 겁니다"

 

 

 

 

클라우스는 잠깐동안 벤을 쳐다보더니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어. 그게 마지막으로 본 클라우스의 얼굴이었지.

 

 

 

 

 

그렇게 떠나버린 클라우스야. 초반에는 허전함만 남았었고 별다른 느낌은 없었어. 근데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날수록 마음이 초조해져 갔어. 매일매일 봐도 보고 싶었던 클라우스가 더 보고 싶고 그리웠던거지. 밤마다 침상에 누워 가슴을 꼭 부여잡고 앓던 벤이었어. 하루는 주채할 수 없이 흐르는 눈물에 소매가 흠뻑젖은 적도 있었고, 며칠동안이나 밥을 한 끼도 먹지 않아 쓰러진 적도 있었지. 벤은 생각했어. 차라리 클라우스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지금처럼 가슴앓이를하지 않은 채 쉽게 잠자리에 들진 않았을까. 머릿속에 가득 차 그리움에 사무치는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을까. 여러 가지로 클라우스를 원망해봤지만 결국에 돌고 돌아 마주한 현실은 클라우스가 곁에 없다는 거였어. 벤이 어떤짓을 해도 클라우스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거지.

 

 

 

그 후로 며칠 뒤 벤 앞으로 그림이 하나 들어왔어. 화조도였지. 누군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그건 클라우스가 보낸 게 확실했어. 왜냐면 클라우스가 화조도를 정말 좋아했었거든.

 

 

 

 

 

"아~ 화조도 갖고 싶다"

 

"그건 결혼하는 부부한테 주는 그림이지 않느냐" 

 

"뭐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떻습니까? 갖고 싶으면 갖는 거죠"

 

"나중에 네가 결혼하게 되면 내가 보내주겠다"

 

"..저는 결혼하고 싶어도 못 합니다"

 

"..? 어째서?"

 

"그 분이 저랑 결혼해주시지 않을게 틀림없으니까요"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구나"

 

"그게 그렇게 되는 건가.."

 

"어떤 사람이냐?"

 

"음... 곱습니다"

 

"그게 전부?"

 

"네 너무 고와서 제가 함부로 건드릴 수가 없다죠"

 

"그게 무슨말이냐"

 

"있습니다 그런 게!"

 

 

 

 

 

클라우스와 함께했던 추억들이 생각나면서 오랜만에 미소가 지어졌어. 화조도를 펼쳐보니 새하얀 국화꽃 위 새 두 마리가 목을 겹쳐있었지.

문득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클라우스가 항상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이 있었어.

 

 

 

 

"도련님은 참으로 곱습니다"

 

 

 

 

 

그제서야 벤은 수소문해서 클라우스를 찾아다니기 시작했어. 클라우스를 보며 느꼈던 감정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게 된 거야. 클라우스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모든 게 정리될 것만 같았어.

몇 달이 지나 하나의 서신이 벤앞에 도착했지. 긴장이 됐는지 손을 벌벌떨며 서신을 열어보는데 벤은 다른 건 다 필요 없으니 무사히만 지내고 있으라고 작게 읊조렸어. 하지만 하늘은 벤의 편이 아녔나 봐. 서신 속 내용은 키가 크고 곱슬머리를 가진 젊은 상인이 발을 헛디디어 절벽에서 떨어졌다는 말이 적혀있었어. 클라우스가 아닐 거야 그럴 리가 없을 거라고 수백번이고 되뇌이고 빌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클라우스였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벤의 입술은 파르르 떨렸어. 조금 뒤 무슨 생각인 건지 화조도 속 새 한 마리를 찢더니 휘청이며 일어나 걸음을 옮겼지. 폐가 찢어질 듯 아파졌지만 전혀 동요하지 않고 하염없이 걸었어. 시야가 아득해질때쯤 도착한 곳은 클라우스와 벤이 처음 만났던 산의 꼭대기였지. 숨을 고르고 허리를 펴 바라보니 바람이 살랑하고 불어 흐르던 땀들이 식어갔어. 이상하게도 마음이 진정되면서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지. 체념이었을까?

 

울퉁불퉁 올라와 있는 봉우리들을 보니 마치 벤의 마음같았어. 마음대로 솟아올라 벤을 마구 괴롭혔으니까. 기뻤다, 슬펐다, 아쉬웠다, 화났다 여러감정들이 벤을 덮쳐버렸어. 더는 버틸 수 없었던 벤은 울부짖었지. 

 

 

 

 

"비단 물결은 달을 따라 세상을 두루 다니는데 너는 어느새 한 폭의 그림이 되어버렸구나. 그대가 말했었지. 어떤 사람은 죽는 순간까지도 사랑을 모른다고. 나는 아직도 이게 사랑인지 모르겠구나. 그저 네가 그리울 뿐이다. 발걸음을 재촉할 테니 조금만 기다리거라."

 

 

 

 

터벅터벅 한발자국씩 걸어 산의 절벽끝에 다다르고 벤은 온 몸에 힘을 풀어버렸어. 세차게 공기를 갈라서며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에 벤이 눕혀졌지.  붉은색의 무언가가 클라우스의 눈동자와 같은 나뭇잎들을 물들여갔고, 차가운 눈들은 남은 벤의 온기에 닿아 사라졌어. 그렇게 벤은 눈을 감은 채 생에 마지막 눈물을 흘렸지.

 

 

 

 

 

 

 

 

 

안타깝게도 여기까지가 벤의 이야기야.

 

 

 

 

벅차오르는 감정을 다 담아내지 못한 벤을 누가 원망할 수 있겠어.

 

 

 

그저 서툴렀던 죄밖에 없었던거지.

 

 

 

 

 

 

자, 지금부터는 클라우스의 이야기야.

 

 

 

 

아  물론 클라우스의 이야기는 내가 말해주지 않을 거야.

 

 

 

 

꼭 내가 말하지 않아도 되거든.

 

 

 

 

왜냐면

 

클라우스는 죽지 않았으니까.

 

 

 

 

*클라우스 시점

 

처음엔 단순한 호기심이었고 두 번째는 호감이었다. 세 번째에 마음을 접으려했지만 곱디고운 너의 두 손이 잊혀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보자고한 생각이 훌쩍넘겨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너를 찾아갔다. 별것도 아님에도 너는 세 살배기 아이처럼 기뻐하며 좋아했고 그런 너의 모습이 좋았다. 돌이킬 수 없이 내 마음은 깊어져갔고 이 마음이 널 혼란스럽게 해버렸다. 절대 그럴 의도는 없었는데. 혼자서 마음고생 하다 말려고 했는데. 당장 앞에서 예쁘게 웃는 너를 보고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내가 결혼을 하게 되면 화조도를 선물해주겠다는 네 말에 심장이 철렁했다. 나는 너와 결혼할 수 없으니까. 그게 맞는 거니까. 그래도 입은 제멋대로 움직이더니 끝끝내 너의 두 눈동자를 흔들리게 해버렸다.

 

 

 

 

 

떠나야만했다. 더이상 널 혼란스럽게 할 순 없었다. 하지만 인간이란 미련하기 짝에 없었다. 떠나겠다는 나의 말에 금방이라도 울것같아 보여 함께 떠나자고했다. 혹시라도 나와 같은 마음일까 봐. 답답해하던 너에게 자유라는 달콤한 말을 써가면서까지 널 내 곁에 두고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너는 미안하다는 말만 연신 내뱉으며 눈물을 흘렸다.

곱다 고와. 보드라운 양 뺨에 투명한 눈물이 흐르는 게 혼이 나갈 것 같았다.

너를 사랑하지 않는 이에게 사랑을 구하지 말지어라. 어떤 사람들은 죽는 순간까지도 사랑을 모른다.

아마 너는 끝까지 아무것도 모를 것이다. 그러길 바랄 뿐이다.

 

너를 떠나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한쪽이 허한 채로 살아갔던 것 같다. 물건을 내놓지 않는 날에는 하루종일 멍을 때리며 손을 만지작만지작 거렸었다. 이렇게 가다가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을것같아 너에게 보낼 선물을 구하러 떠돌았다. 운명처럼 형형색색의 화조도가 내 눈에 들어왔고 뺏길세라 서둘러 사 들고 곧바로 아는 사람을 통해 너의 집으로 보냈다. 괜한 짓을 한것같아 후회됐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 마음이 남아나질 않을 것만 같았다.

며칠 뒤 달갑지 않은 소문이 돌았다. 산을 타던 상인이 발을 헛디디어 절벽에 떨어져죽었다고. 안타까운 일이었다. 보통 눈이 많이 내리는 겨울에는 몸을 사리는 편이니까. 그리고 며칠 뒤 또 다른 소문이 돌았다. 높은 집안의 자제가 절벽에 떨어져 죽었다고. 듣기로는 손에 화조도에서 잘린 새 한 마리를 손에 꼭 쥔 채로 있었다고 했다.

 

 

 

 

아니길 바랬다. 그 손에 있던 새가 내가 선물한 화조도의 새가 아니길 바랬다. 

 

산을 넘기에는 너무 많은 눈이 내렸다. 자칫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었지만 중요하지 않았다. 네가 살아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눈을 해치고 해쳐 보름이 지나 도착한 너의 집에는 끔찍하게도 네가 없었다. 몸이 약해 스무걸음도 겨우 걷던 네가 그 추운 산길을 홀로 올라가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했다는 게 사실이 되었다. 한 방울, 두방울 눈물이 떨어졌다. 야속하게도 희고도 차가운 눈은 계속해서 내렸고 나는 헛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어찌 잊으라하십니까, 그 빛나고도 짧았던 한때를. 그저 다 잊으러하면 까맣게 잊힐 줄 아십니까. 새처럼 훨훨 날아가신 님이여. 그리도 추운 곳에 홀로 올라 눈물을 지새우셨습니까. 곧 저도 따라갈 테니 부디 발걸음을 늦추소서. 사랑했고, 사랑하고, 사랑하겠습니다."

 

 

 

 

 

 

 

하얀 국화꽃 위 서로의 목을 감싸고 있던 새 두 마리 중 하나가 기척을 내는구나. 애원하듯 목을 부비는 새를 제쳐두고 날갯짓을 시작하더니 머지않아 꽃 위를 떠나버렸다. 새하얗던 국화꽃이 붉게 물들어가고 원망스러운듯 투명한 눈물을 떨어뜨리는 새 위로 흰 눈이 내리는구나.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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