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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속의 그대

​- 홍홍 @duxkduxk

파이브 바냐

파이브-최연오/ 바냐-김은아

 


인연 연 자에 만날 오/온화할 은 흰 빛 아 (목성님 감사합니다)

누구도 가본 적 없는 산골 외진 곳에 혼자 사는 여인이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시작은 과거를 보기 위해 먼 길을 오른 유생 하나가 마주쳤다가 흘린 설이었다. 

- 여인은 모습은 어떻든가?

옆에서 술을 거하게 걸치고 있던 노인이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 

- 딱 보기에도 수수하고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간 것인지 척 보기에는 아직 처녀처럼 보였습니다. 대화를 길게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눈치라, 감사하게도 빌려주신 방에서 눈만 붙이고 묘시로 넘어갈 때 움직였지요.

말끔한 외모의 청년은 주막에서 크게 떠들어댔다. 근처에는 작은 마을 하나밖엔 없었기에, 한가로운 남정네들이 소문의 여인을 보겠다고 산을 오르려고 하는 건 당연한 순서였다. 단지 보기만 할 뿐인가, 신부로 삼아오겠다고 큰소리친 이도 적지 않았다. 그 중 또 몇몇은 소문을 시작한 유생에게 그가 온 길을 되묻는 꼼수를 부리려 했으나, 여인에게 그러했듯 얼마 머물지 않고 금방 떠나버렸다. 문제는 있고 그 답은 나오지 않았으니, 놀 거리도 없던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누가 먼저 그 험한 산에 올라 그를 만나느냐가 가장 주된 논의 거리가 된 것이다. 험한 산길에 되레 포기하고 내려오는 것을 수없이 반복하고 나서야 어느 샌가부터 그 풍설風說은 심신 건강한 청년들을 현혹하는 꼬리 아홉 달린 요괴로 탈바꿈했다. 가지지 못한 것을 제멋대로 비난하고 나서야 그 이야기는 잠들지 못하는 아이를 겁주기 위한 설중에 하나로 바뀌어 더는 그 소문을 따라 산을 타려 하는 이는 없었다. 낡은 초가집에 사는 김 씨네 막내 여식, 은아는 -이제 이런 호칭으로 자신을 부를 이는 없겠지만- 간혹 바람을 타고 저에 대한 기괴한 소문이 흘러들어올 때가 되어서야 산비탈을 내려가 마을로 돌아가 본 적이 꽤 오래 전이였음을 기억해냈다.

" 그렇다고 그들 중 누가 내 이야기를 들어줄 텐가,"

물에 담가둔 이불보를 꾹꾹 밟아가며 은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저도 모르게 혼잣말이 는 것은 말동무도 없이 이곳에 숨어 지내며 늘은 오랜 습관이다. 스스로 자책하고 주저앉다가도 밥때가 되면 몸이 알아서 움직였다. 이 아무도 찾지 않게 된 깊은 산골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면 첫날밤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명을 달리했던 이젠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안쪽 양반과 다를 게 없었을 터였으므로 괜스레 더 부지런을 떨어보는 것이다. 

*

어느덧 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높은 산이라 그런 것인지 아랫마을보다 이른 시간에 어둠이 마중 나왔다. 온종일 한 빨래들을 곱게 펴 말리던 은아는 갑자기 분주해졌는데, 날이 좋은 걸 보아하니 오늘 밤은 별이 잘 보일 것이라는 생각이 스쳤기 때문이다. 치마폭을 꼭 잡아채고 하나, 둘, 수를 센 뒤에 절벽 쪽으로 그대로 내달렸다. 해가 완전히 모습을 감추기 전에 매번 산길을 오가며 꼼꼼히 외워둔 길을 다시 찾아가 별을 보기 위함이라. 

정인을 어린 나이에 잃은 뒤에 부모의 등쌀에 떠밀려 얼결에 하게 된 원하지도 않던 혼인. 그마저도 먼저 떠나간 안쪽 양반을 그리워할 새도 없이 본인을 눈앞에서 당장 치우고 싶어 하던 시댁의 눈치에 도망치듯 이곳에 숨어 살아온 지가 어언 7년이다. 산비탈을 굽이굽이 힘들게 걸어 내려가 마을 사람들과 하지도 않은 잘못으로 돌을 맞는 대신에 은아가 선택한 것은 해가 떨어질 즈음 가장 높은 절벽을 향해 달려가 크게 뜬 달과 마주하는 것이였다. 달은 이야깃거리에 나오는 만큼 그리 크지 않았고, 가끔은 들짐승이 서로 울어대는 통에 무섭기도 하였지만 한때 살았던 마을도 내려다보이며 동시에 하늘이 가득 차 있는 장소가 이만한 곳이 또 없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겨우 도착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다다른 곳은 풀벌레가 우는 소리가 채우는 것 외에는 바람이 소리마저 고요했다. 평소 느끼는 외로움과는 닮았으면서도 어딘가 위로받는 기분이라,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한참을 앉아 있다가 해가 슬슬 고개를 내밀기 시작하는 신시 즈음 아쉬운 발걸음을 이끌고 돌아오곤 했다. 자주 앉고는 하는 공간이 자신 외에 누구도 다녀가지 않았음을 증명하듯이 살짝 패여 있는 것이 모양이 우스워 괜히 웃음이 났다. 치마를 대충 정리한 뒤에 그 위에 풀썩 주저 앉아본다. 밤은 추웠지만 혼자가 아닌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전래 동화에서 주인공들이 주로 동물들과 대화를 나누며 세상살이에 대한 지혜를 얻고는 하겠지만, 그저 달을 벗 삼아 하염없이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그에겐 충분할 것이었다. 오늘따라 달이 좀 더 푸르스름하니.. 무언가 이상한데, 하는 생각과 동시에 말 그대로 그곳에서 사람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푸른 빛이 번쩍, 하고 달 근처에서 작게 일렁이고는 본인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 아이가 짧은 비명과 함께 제 앞에 고꾸라졌다. 금세 털고 일어나서는 주변을 살피는 게 그리 높은 하늘에서 떨어졌으나 몸엔 생채기 하나 긁히지 않고 더해서 이러한 상황이 익숙한 듯 보였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비유가 아니었군. 은아는 순간 온 길로 그대로 뜀박질해서 도망간다, 와 하늘에서 내려온, 아니 그대로 떨어진 어린 사내에게 연유를 묻는다는 일생일대의 고민에 잠시 어정쩡한 자세로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 고민은 아주 찰나였으나 아이가 떨어진 곳도 매우 가까워서, 꼬마 도령이 은아를 발견하고는 마치 매번 마주치던 말동무처럼 말을 걸었으니 둘 중 하나는 무용지물이 돼버린 셈이다.

" 거기 선녀, 여긴 천당이요?"

" 예?"

헛것을 들었나 했다. 자주는 아니어도 간혹 마주치던 이방인들에게 별별 호칭으로들 불려보았고 어느 정도 수준이라면 못 들은 체하고 넘어갈 정도의 유연함이란 것이 생겼으나, 이런 접근은 제법 신선했다. 하늘에서 떨어진 건 오히려 본인이었으면서, 저에게 선녀라니? 게다가 이곳이, 뭐라고? 

그제야 도령의 차림새가 눈에 띄었다. 선비인 마냥 젠체하는 말투는 이곳을 오가곤 하던 사내들과 별다른 점이 없었으나, 제 몸보다 훨씬 큰 성인의 것을 빌린 듯한 품이 크고 척 보기에도 결이 좋아 보이는 푸른 도포에, 끈을 제대로 묶지 않아 살짝 흘러내린 갓부터, 특히 그의 태사혜(太史鞋)가 하얗게 장식되어 있는것이었다. 다른 것들은 그러려니 해도 신어도 굳이 노인의 신발을 신는단 말인가? 은아는 얼굴에서 의문을 지우지 못한 채 도령의 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여인의 시선을 받아본 적이 없는 것도 아닌데, 괜히 발끝이 콕콕 찔리는 것 같아 마지못해 입을 연 것은 조금의 정적 이후였다.

" 구경하는 건 그만두고, 어딘지 말 좀 해주지 그래."

" 아, 지상입니다."

사람을 대하는 게 어리다는 것을 이리 티를 내버렸구나. 은아는 속으로 또 자책하며 한참이고 들여다보던 태사혜에서 시선을 거두고 뒤늦게 대답했다. 수상한 차림새의 사내는 눈에 띄는 총명한 옥색 빛 눈을 지닌 것 치고는 그 쉬운 단어가 이해가 안 되는지 입술을 한껏 구기고 얼굴에 떠오르는 의문을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기어이 갓을 내리고 제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헤치는 것이 아닌가.

" 그럴 리가 없는데.. 뭘 놓친 거지?"

" 혹 제게 물으시는 겁니까?"

" 그래, 선녀. 나는 몰라도 그쪽은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 이 몸은 분명 신이 될 자였는데. "

이젠 선녀라고 그만 불러주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생길 즈음에 이번엔 또 자신을 신이 될 몸이었다고 소개한다. 이 무슨 해괴망측한 대화란 말인가. 은아가 아직 마을에 머물 때 이런 얘기가 오갔다면 이미 못들은 체하고 발걸음을 빨리 했을수도 있었을터였다. 처음 마주하는 것인데도 제멋대로 탁탁 말을 놔버리는 저 괘씸함을 보고서라도 더욱이 그랬을 것이나, 단지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는 분명했다. 그에게서 신으로서의 웅장함과 경외심이 보인다기보다는 그저 저와 눈높이가 적당히 맞는…. 

" 신보다는…. 꼬마 도령이 가까운 것 같소만.."

" 뭐, 꼬마 도령..?"

꼬마 도령이라고 불린 사내는 퍽 당황한 눈치를 하며 그제야 제 몸을 돌아보았다. 양팔을 들어 보이니 안 그래도 큰 소매가 흘러내려와선 소맷부리에 손등이 다 덮이기까지 했다. 이 무슨 우스꽝스러운 복장이란 말인가? 분명히 이곳에 오기 전에는 본인은 노인의 몸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은아는 그가 참 별나다고 생각을 하며 대충 고개를 주억거렸다. 방금 마른하늘을 그대로 찢고 제 앞에 추락하는 걸 본 은아가 그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를 안 믿기에도 어째 아귀가 맞지 않았으니 잠자코 듣고 있었다. 

" 그럼 그쪽은 선녀도 아니고, 여기는 천당도 아니고."

" 그렇습니다. 가장 높은 축에 속하는 절벽일 뿐입니다."

" 난 꼬마 도령이고."

" ..그것도 맞지요."

순순히 대답하는 여인을 가만히 관찰하던 사내는 장난기 섞인 말투로 말했다.

" 이 모습이 마음에 드는가? 퍽 귀엽다거나, 정이 든다거나,"

잠시 여인의 얼굴에 스친 표정을 읽은 그는 시원하게 웃어버렸다.

" 여간 딱딱해서 농도 못치겠구만." 

" ..요근래 사람을 대해 본 적이 손에 꼽아서 그렇습니다. 더해서, 겉보기로만 따지자면 제가 보호자 같을걸요?"

" 거 내가 지아비도 아닌데 말 좀 편하게 하세. 친우처럼."

" 친우처럼?"

" 아니면 제대로 존경심을 담아서 예를 갖추시던가.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니지 않은가."

은아는 내내 존댓말을 입에 달고 살았지 저에게 말을 놓으라는 이가 없었기에 이 과정이 매우 오래 걸렸다. 코흘리개 시절 벗 삼았던 친우들도 금세 포기하고 됐다, 은아야! 쓰던 대로 해도 된다! 하고는 버럭 소리를 치곤 했으나, 꼬마 도령은 꽤 참을성이 좋은지 그가 적절한 대답을 꼽을 때까지 재촉도 없이 가만히 은아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기만 했을 뿐이였다. 겨우 대답할 단어를 고르고 나서야 눈이 마주쳤다가 날씨에 어울리지 않은 더위를 급히 느끼며 은아는 시선을 도르륵 반대쪽으로 굴렸다. 

" 그, 그럼…. 편히 하겠소."

" 이제 좀 낫네."

그들은 그날 처음 만났지만, 마치 오래 알던 존재인 것처럼 나란히 낮은 풀밭에 앉아서 하염없이 별을 세며 담소를 나누었다. 은아는 그 얼굴이 꽤 익숙하다는 생각을 아주 잠깐 했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져 그가 하는 말소리가 멀어지는 듯 작게 들려왔다. 분명 정인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본인의 얘기를 한 건지 남의 얘기를 빌려왔던 건지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졸음이 쏟아져 잠시 눈을 붙이고 나니 혹여나 자신이 신이 된다면 빌 소원을 5가지는 정해두라 득의양양하게 외치던 푸른 도포의 아이는 온데간데없고 은아만 풀밭 위에 누워 아침 해와 함께 눈을 비비고 있었다는 것은 한참 뒤에야 깨달은 사실이었다.

***

은아는 그날을 한낱 꿈으로 치부하고 한동안 잊고 살았다. 그도 그럴 게, 그와 대화를 했다는 것만 어렴풋이 기억이 나고 무슨 대화를 했는지가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 탓이었다. 곰곰이 되짚어보며 그 뿌리를 찾으려 해도 되려 몽롱하고 졸음이 몰려오기만 했다. 머릿속에서 누군가 꿈속에서 그를 만날 수 있다고 속삭이는 듯했다. 그 말이 맞는 것도 같아 얼마 전 부드럽게 말린 이불에서 혼이 나간 듯이 잠만 잔적이 있었다. 이렇게 누워만 있어선 안 된다, 하고 스스로 호통을 치고 나서야 퍼뜩 돌아온 정신으로 다시 바삐 움직이기 시작한 지, 그를 떠올리지 않은 지도 어느새 보름. 

예처럼 해가 저물기 시작했고, 이번에는 급한 마음도 없었으니 주변에 나무가 이리도 모여 있었던가, 스스로 감탄을 하며 그 절벽을 여유롭게 걸어 올라가던 때였다. 그 걸음은 얼마 가지 않아서 멈추고 말았는데, 멀리서부터 보더라도 못 알아볼 수가 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던 탓이다. 당연히, 지난번 꿈처럼 왔었던 꼬마 도령이었다. 상징처럼 몸에 두르고 있는 푸른 도포가 달빛을 받아 더욱더 푸르게 빛나고 있었기에, 은아는 그 모습이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 아래서 달빛을 받아 그리 보이는 건지 아니면 이것도 부릴 수 있다는 주술 중 하나인지가 궁금했지만, 평소의 성질대로 따져내지는 않았다. 일단 오랜만이라 묘하게 반가운 마음이 앞선 것은 사실이었으니. 

" 왔군."

도령은 곁눈질로 은아가 온 것을 확인하고 환하게 미소지었다. 꽤 긴장하고 있었던 은아와는 다르게 사내는 그가 올 것을 미리 알고 있는 눈치였다. 웃을 때 인상이 확연히 달라지는 것도 달라지는 거니와, 우리가 그리 마음을 통한 사이였던가 착각이 들 정도의 따뜻한 얼굴이라 은아는 괜스레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 ..내가 올 줄 알았던 거요? 난…. 그 쪽이 여기 있을 줄도 몰랐는데."

" 지난번에 이곳을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도 꽤 마음에 들었소."

앉게나, 딱 좋은 시기에 왔으니. 은아는 그 옆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사내의 시선을 따라 하늘을 보았다. 딱 좋은 시기. 입술을 따라 달싹여보며. 은아의 수많은 생활을 혼자 고독히 보내곤 했었던 이곳에서 같은 하늘을 공유할 동지가 생겼다. 그보다 지난번에 못 한 말이 있었는데, 라는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물을 머금은 종이처럼 빠르게 사라져갔다. 

" 그러고 보니, 웃긴 일이지 않소."

은아는 달을 골똘히 바라보다 어느새 술병을 가지고 돌아온 사내를 돌아보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어디서 난 것인지 잔 위에 꽃을 띄워서 한잔, 두 잔 들이키고 있는 것이다. 그는 어린 몸뚱이를 지녔음에도 직전에 노인이었다는 말은 사실이었는지 그 모습이 어른을 흉내를 내는 놀이처럼 보이지는 않은 데다가 퍽 자연스럽기까지 했다. 은아에게 같이 마시지 않겠는가 권했지만 마시고 또 까무룩 잠들어버리고 한참을 그를 그리워할 것만 같아 거절했다. 도령은 혼자 마시는 저가 적적하니 잔을 들고만 있어 달라며 빈 술잔을 쥔 채로 은아의 손을 감싸 잡았다. 은아는 다른 건 다 잊어도 이 촉감은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는데, 맞닿은 부분이 홧홧했기 때문이었다. 술에 가볍게 취해 자꾸 손을 놓치던 도령도 무언가 요상한 기분이 스쳤는지 얼른 손을 떼내고는 하늘을 보기 일쑤였다. 

" 무엇인데 그렇게 운을 띄우시나?"

분위기를 애써 무마하기 위해 아까의 더움을 못 느낀 척 은아는 답했다. 그제야 하려던 말을 되찾은 도령은 다시 장난기 넘치는 얼굴로 돌아왔다. 술을 한잔 두잔 걸칠 때는 그렇게 늙은이 같더니 이번엔 또 한참 어린 남동생 같기도 한, 신기한 사내였다.

" 내가 괜히 이곳에, 이 몸뚱어리로 떨어진 것이 아닐 것이라 지레짐작은 하고 있었네만."

" 그래서?"

" 내 옛 정인과 그대가 똑 닮았소."

애써 식힌 열기가 다시 차오르는 느낌이다. 은아는 무방비하게도 얼굴에 열이 몰리는 걸 느끼며 사내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뒤늦게 자신이 어떤 말을 뱉었는지를 깨달은 사내는 손을 휘휘 저으며 그런 의도가 아님을 표하려 애를 썼다. 역효과로 더 더워지면 더워졌을 뿐이지만. 그 모습이 우스꽝스럽기도 해서 은아는 벌게진 얼굴을 하고서는 오랜만에 크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얼마 만에 이리 마음 편히 웃어 보였던가. 정인이라, 어릴 적 부모 몰래 평생을 약속했던 그, 원하는 바를 이루고 돌아오겠다는 그, 항상 푸른 옷이 참 잘 어울리고 머리가 비상해 주변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던 그, 남들에게 안 보여주던 웃음을 저에게만 지어주던 그. 

한참을 머릿속을 괴롭히던 해답이 보이는 것 같았다. 이 반갑고도 슬프고 익숙한 이 얼굴과, 올라간 입꼬리, 저 총명한 눈 속에는 깊은 옥색이 있는데 어째서 알아보지 못한 것일까? 저 혼자만 평생을 마음에 담아둔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과거에 묶인 본인을 채찍질하고는 했는데, 그랬는데, 은아는 그의 이름을 기억해내고 소리내어 부르려고 했다. 인연 연 자에 만날 오 자를 쓰는 최연오. 나의 정인이여. 입을 열어 그때의 마음을 전하려 하였으나, 은아는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지는걸 떨칠 수가 없었다. 어느덧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 또 같은 곳에서 잠이나 잤군."

잠을 잘못 잔 것인지 온몸이 쑤시고 운 기억이 없었으나 얼굴 여기저기에 눈물이 메말라 붙어있는 것이 이상했다. 악몽이라도 꾼 것일까, 손수건으로 대충 닦아내다 다섯 오자의 자수가 박혀있는 것을 그제야 발견했다. 숫자를 보고 그리운 느낌이 들다니, 저도 참 주책이다 싶어 다시 집어넣고는 풀밭에서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크게 피었다. 이젠 집에 돌아갈 시간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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